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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한겨레문학상 수상작가 작품집 - 끝까지 이럴래? (스포주의)

유하우스 2020. 2. 15. 21:31

 

갈수록 삭막해지고 냉정해지는 세상의 안과 밖에 끼어 희망의 지평을 노래한 작가 13명이 뭉쳤다.
시대의 회상과 현실의 부조리함을 동시에 이야기 하는 30대와 40대들의 대조적인 시선이 신기했으며 작가 소개란의 생년월일을 참고 하면서 작품을 비교하는 맛이 썩 흥미로웠다. 이토록 다양한 관점들은 음식을 가져오기가 용이한 뷔페에서 떠먹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단편소설 모음집이 가진 나른하고 편안한 색조가 하나 하나의 작품에 애착을 갖게 했다.

형용하기 어려운 그들의 공통적인 아름다움을 차치하고 지금 나의 머릿속에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는 작품은 서진의 '홈, 플러스'와 김곰치의 '졸업'이다.

무조건 악보대로 완주해야만 좋은 곡이라는 선생님의 호통이 피아노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앗아가버린 한창훈의 '그 아이'와, 코 앞에 다가온 지구 종말에도 솔직해지지 못하는 아니, 끝까지 겸손해지지 못하는 박민규의 '끝까지 이럴래?', 완전히 은둔형 외톨이의 시선에만 의지한 최진영의 '월드빌 401호' 또한 인상 깊었지만 소재의 참신함에서는 저 두 작품이 1,2위를 두고 다투는 용호상박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서진의 '홈,플러스'는 의뢰인의 청탁을 받아 사라진 이를 찾아주는 뱀파이어의 이야기다. 뱀파이어는 의뢰인의 피를 마셔야만 피에 함유 된 실종인을 향한 열정으로 가열차게 일을 할 수 있다. 사라진 아들을 찾아달라는 계모의 부탁을 받고 홈플러스에서 마주친 동규는, 그의 시야에 들어온 순간 계모의 열정으로 대책없이 덜미가 잡히고 만다. 영악한 동규는 자신의 잘못은 시인하지 않고 도망치느라 다리에 맞았던 후라이팬의 상처만 계모에게 이르면서 집으로 돌아간다. 아들의 치료비를 제한 수고비를 탁자에 내려 놓은 계모에게 그는 동감할 수 없었다. 어렸을 적부터 부모의 학대를 견디고 자란 터라 한낱 계모의 심정이 이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병원에 계신 나뭇가지 같은 아버지를 찾아간다.
그리곤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아버지를 제압한 후, 주삿바늘을 혈관에 꽂아 자신이 먹을 만큼의 피를 채혈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뱀파이어에게 죄책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의 피를 빨아들인다.
하지만 그 피는 아들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고, 만족스럽게 피를 빨던 뱀파이어는 이제껏 경험 해보지 못한 심장박동을 느끼며 당황스러워 한다.
사랑하는 아들이 남의 피를 빨아먹는 신세가 될 때까지 교류의 부재가 있었던 것은 안타까운 일이며 내게 먼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큰 그림으로 보아 이것은 분명 부정(父情)을 그려냈지만 마치 판타지 소설을 보는 듯한 즐거움 또한 함께 거머쥔 것이 눈에 띄는 작품이었다. 판타지 세계에서 현실로 하강하는 속도가 부담스럽지 않았던 것과 유하고 매끄러운 흐름이 참 좋았다.

김곰치의 '졸업'은 중학교 졸업을 앞둔 남학생, 여학생의 첫사랑 이야기다.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좋아하는 보경은 그 날도 어김없이 순철을 앞에 앉혀다 놓고 가상의 장면 장면을 각색해내기 시작한다. 그녀는 아마 성인이 된 후의 순철이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 길을 찾는 듯 헤매고 있는 한 여자에게 버스 노선과 배차 시간을 알려주고 나서 이상하게 자리를 뜰 수가 없더란다. 보경은 그 여자가 바로 영은이라 말했고 순철은 상상 속의 영은보다 눈 앞의 화가 난 듯 자신을 노려보는 보경을 보며 몹시 당황스러워 했다.

그는 영은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자신이 망설일 일은 없을 것이며 무엇보다 너의 이야기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까 화를 낼 일이 아니라고 차분히 보경을 타일렀다.

보경의 이토록 우울한 상상은 내일이 졸업식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식이 끝나면 보경은 도시로 이사를 가고 순철은 시골에 남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깜깜한 밤에 서로의 손을 잡고 눈을 감았다.

편안한 마음으로 지각한 순철은 내심 기대했던 상을 받지 못했다. 지각을 했으므로 교무실 문을 열기까지 많은 용기가 필요했는데 돌연 떠오른 보경의 얼굴은 그녀도 나처럼 교무실 밖을 서성이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졸업식이 끝나고 함께 사진도 찍기로 했기 때문에 학교를 뒤지며 그녀를 찾았는데 이미 조용해진 학교보다 더 고요한 공기가 숨을 턱 막히게 했다.

한달음에 내달린 그녀의 집은 무너진지 오래였다.

그 집 에서 담배를 피우는 순철은 어릴 적 보경의 상상대로 훌쩍 자라있었다. 그리고 집에 오기 전 버스 정류장에서 마주친 혜진이라는 이름의 '이거 참 실망인데.'라는 말을 떠올린 순간 그는 멈칫했다.

장면을 이루고 있는 배경의 따뜻함은 첫사랑 영화의 여파인가 작가의 의도인가 알 수 없게 아름다운 색채로 물들었다. 첫사랑 이야기는 아름답지만 언제나 이루어지지 않는 편이 더욱 아름다운 것 같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구성이 마음에 들었고 '버스 정류장에서 마주친 여자'를 추억과 그리움과 후회의 매개체로 만들어 낸 작가의 역량이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홈,플러스'와 '졸업'을 통해 내가 시대를 오가는 이야기에 마음이 끌리는구나 라고도.)

전통적 권위를 가진 한겨레문학상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작품을 선별 했다는 것은 미래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신인 작가들에게 마음을 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처럼 좋은 작가를 발굴해내고자 하는 문학상에 수준 높은 상상력을 보내보자. 훗날, 누군가 나의 글을 읽고 '수상 작가 단편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감탄하는 독후감을 쓸 지도 모르는 일이다.

문학상 수상 작품들은 짧은 글에 큰 힘으로 나에게 배움을 준다. 아마 그 글을 써내느라 흘린 땀방울이 뱀파이어가 마신 피처럼, 순철의 손목에 자그맣게 뛰고 있는 보경의 존재처럼 필경 우주를 흔드는 힘이 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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