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출생 유대계 미국 소설가 조앤 그린버그는 미국의 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이 꼭 읽어야 할 고전작품을 많이 써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이 소설은 영화와 연극으로도 상영되어 베스트셀러로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주인공 데버라는 정신분열증을 앓는 환자로 나오는데, 그녀를 둘러싼 가족과 병원 관계자 및 환자들의 행동이 매우 날카롭게 묘사된데에는 작가의 자전적인 작품이라는데 이유가 있다.

데버라는 '이르'라는 자신만의 세계에 만들어진 형태들에게 끊임없는 괴롭힘을 받는다. 그것들은 현실세계와 '이르'에 명확한 선을 그어두고 이곳이 더 편안하고 확실히 옳은 곳이라는 꼬드김을 반복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이르'의 세계가 있다면 그것은 엄연한 세계가 되겠지만 전 세계인 중 딱 한 사람, '이르'는 오로지 데버라에게만 존재하기 때문에 그녀의 가족은 회색 벽의 이상한 소리가 나는 정신병원에 그녀를 집어넣을 수 밖에 없었다.
그 곳에서 그녀는 각자의 이유로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의 앞 뒤가 맞지 않는 대화와 느닷없는 고함을 들으며 아주 천천히 그 곳에 적응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날 데버라는, 큰 소동을 벌였거나 문제를 일으킬 위험이 있는 사람을 이전시키는 D동으로 옮겨지게 된다. 그 소동이라 함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는 피학적인 행동과 종잡을 수 없는 고성을 일컫는다. 자신의 세계에 꼼짝없이 갇혀버린 그녀의 탈출구는 어디일까?

 

프라이드 박사는 '이르'가 허구의 세계임을 확신시키는 동시에 그녀 스스로 본심을 입 밖에 꺼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르'와 타협한 것 같아 보였던 데버라에게 한낱같은 희망은, 현실 세계의 평범한 것을 나도 하고 싶다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뜨개질과 같은 간단한 것. 교회에 다니고 싶다는 소망.

하지만 우리에게는 별 볼일 없이 여겨질 평범한 일상이 그녀에게는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실패하고 좌절해 병원에 다시 돌아온 그녀에게 만약 병원 관계자들과 박사 프라이드의 끊임없는 도움이 없었다면 그녀의 '이르'세계는 온전히 그녀를 잠식시켜 버렸을지도 모른다.
정신분열증은 스스로를 갉아먹는 병이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의 진실한 동정과 공감이 필요하다.
프라이드 박사가 보인 교류를 위한 노력은 환자를 담당하는 모든 병원 관계자들이 닮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아직까지 내 주변에는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없지만 언젠가 내 곁에서 정신분열로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도 프라이드의 자세를 취하고 싶다. 

또, 다른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사실 내게도 데버러같은 비밀 이르공간이 있다. 내게 즐거움을 주는 세계가 나를 파멸의 길로 끌고 내려가지 않도록 적당히 해야겠다는 무서운 경각심이 든다. 마음이 약하고 의지가 강하지 못한 내가 그녀와 같은 상황이 된다면 아마 나는 영원히 현실세계에 돌아가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어 오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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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중견 작가 요시다 슈이치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무라카미 류 등에 의해 발전한 일본 '팝 문학'의 정점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작품으로는 '파크 라이프'와 '퍼레이드'등이 있는데 작품들이 차례대로 일본 순수문학을 대표하는 아쿠타가와상과, 대중문학을 대표하는 야마모토 슈고로 상을 수상하면서 대중성과 작품성을 두루 갖춘 작가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사랑에 난폭'을 읽고 간결하면서도 흡입력 있는 문체가 맘에 들어 나는 다음번에도 책을 들테지만, 그 땐 작가의 입장에서 본 솔직한 남자의 심리를 엿보고 싶다.
책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모모코와 내연녀가 번갈아가며 자신의 일기를 공개해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는 건, 남성 작가임에도 대단히 날카로운 시선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대도 욕심이 나는 이유는 순수한 독자 입장에서 사고 원인 제공자 남편 마모루의 우유부단하고 쉽게 정의내릴 수 없는 심리가 너무도 궁금하기 때문이다.
자기 아들 감싸기에 급급한 철없는 시어머니 데루코의 아들이기에 얼렁뚱땅 이해가 되는 식으로 넘어갔지만, 그 나름대로의 복잡한 심경을 어디 한 번 구경이나 해봅시다 싶기도 하고 궁금하다.

대충 느낌이 왔겠지만 이건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를 제목으로 써도 손색이 없는 불륜 막장 스토리를 다룬 소설이다.

 

결혼 8년차 주부 모모코는 자신에게 늘 냉담하기만 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며 살뜰히 남편을 내조하는 전통적인 현대 여성이다. 자신의 특기를 살려 문화센터에서 수제 비누 만들기 강좌를 하고, 오는 길에 찬거리를 사서 시어머니와 남편의 식사를 책임지는 평범한 주부에게 불륜은 그야말로 느닷없는 우박처럼 떨어졌는데, 너무도 평온하였기에, 행복을 깨고 싶지 않았기에 모모코는 당장 눈 앞에 닥친 현실을 부정하기 급급했고 그러는 사이 어느새 그녀는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무서운 여자'가 되어있었다. 남편의 불륜 사실과 동시에 내연녀의 임신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땐 과연 내가 어떻게 대처하는게 옳은 것일까. 만약 내게 그런 불똥이 튄다면…
확실한 건, 나는 모모코와 정반대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내연녀의 존재 자체와 임신 여부는 나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다. 내가 해결할 첫번째 미션은, 마치 혼령처럼 내곁에 떠도는 남편과의 관계를 차근차근 되짚어 나가는 일일 것이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참을 수 없는 관계가 되버린다면 그 무엇이 이유가 되었건 같이 살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편을 사랑하지도, 그렇다고 못마땅해하지도, 시어머니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지도, 그렇다고 모진 구박을 받지도 않았던 모모코에게 결혼생활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친한 옛 직장 동료에게 다시 한 번 회사에 일자리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했지만 회사 여직원들의 험담을 통해 알게 된 직장 동료의 본심을 듣고 낙담해있던 찰나, 자신이 예전에 다녔던 회사보다 낮은 회사에 입사 지원서를 넣어도 기다렸다는 듯 떨어지고야 마는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두려움? 다시 시작하기에 늦은 것 같은 마흔이라는 나이와 결혼과 이혼의 꼬리표? 마흔이라면 나보다 족히 열 살은 더 많은 여자에게 주제 넘게 이 말을 남기고 싶다.
남편과 시어머니마저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누군가를 짓밟고 앞다퉈 달려나가는 시점에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을 갖지 않는건 스스로에게 내리는 형벌과 같다고.
다다미를 들고 흙을 파내 그 안에 들어가 남편과 시어머니의 대화를 들은 것과, 예전에 집에 함께 살았던 시아버지의 어머니, 사람들 말로는 '첩'의 억울함이 폭발한 '방화 사건'에 마음이 움직여 본인도 남의 집 화분에 불을 지르고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으면 그걸로 충분히 됐다고 생각한다.

남편과 내연녀의 죄책감은 몽글몽글 살아있게 냅두고, 모모코는 신선한 새 책의 더 튼튼한 첫 장을 찬란하게 시작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잘 사는것이 최고의 복수라는 말을 피부로 절절히 느끼는 날이 올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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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헤밍웨이의 하드보일드풍 작품이다. (그의 하드보일드풍의 걸작으로는 '살인청부업자(1927)', '킬리만자로의 눈(1936)'등이 있다.)

정확한 시기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실업자가 급증하는 경제 공황기를 배경으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못 가진자들의 삶을 첨예하게 나타내었다.
배를 빌려주고 받는 뱃삯으로 아내와 딸들을 책임지는 가장 해리모건은 제 1부 <봄>에서 그간의 수고비를 모두 떼이는 사기를 당하고, 처자식을 위해서였겠지만 2, 3부의 가을, 겨울 사이 따뜻한 여름이 생략된 계기는 그간 거절해왔던 밀수업과 쿠바 중국인들 밀항에 가담하기로 작정하고부터 인 것 같다. 하지만 당시 떼인 돈이 현재의 집 한 채 값이며, 생업 수단인 낚시 장비를 모두 잃어버린 그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으리라.
쿠바인에게 총을 맞고 외팔이가 되어 물 위를 표류하다 미국 관리에게 배까지 압수당하는 신세가 되어 버린 후에도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해리도 앨버트도 먹고는 살아야 했으니까.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는 불쌍한 중국인들을 도와주겠답시고 어차피 죽을 인신매매업자 한 명을 죽였고, 또 다른 살인에 대비해 총을 장전하고 항해에 나섰다.
살인까지 한 그가 마침내 쿠바 은행강도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이야기는 점점 더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데….

 

그는 결국 자신의 배에서 총을 맞는다.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바꿀 수 없다는 미묘한 말을 남긴 채. 뱃사람이 누릴 최소한의 행복마저 앗아간 이들은 결국 가진자들일까?
제목이 얘기하는 가진자는 작품 후반부에 살짝 나온다. 요트를 소유한 소수의 부유층이 언급되는데 아주 살짝 고개만 빼꼼한거라 못 가진자들의 구차한 삶이 더욱 강조되어 보인다.
실제로 당시 시대상은 쿠바의 마차도 정권이 무너지고 군부 쿠데타를 거쳐 격변의 혼란기를 겪은 후 미국이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쿠바를 지배했을 때였으니, 그 때 발흥한 쿠바의 독립을 열망하는 사회주의 혁명 세력 군단과 부유 속에 헤엄치는 자들이 서글픈 차이를 보였던 시기였다. (미국이 1898년 에스파냐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1959년까지 쿠바를 점령한 60년의 모든 시간이 담기지는 않았다. 책은 1937년에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1930년대 평균 가구소득이 200달러인데 반해 극중 인물 앨버트는 정부 구호 프로그램의 일을 하고 매주 7.5달러를 받았다.
사실 굳이 전쟁을 하는 중이 아니어도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모습과 별반 다를게 없다.

 

이와같은 공황이 계속된다면 현재의 우리는 우울증에 걸리거나 자살을 시도하는데, 언젠가는 목숨을 구제하려고 다른 사람을 위협하고 짓밟아버리는것에 '익숙해질수도' 있다.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실업자들을 궁지로 몰아넣으면 안된다. 개인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의 권리를 빼앗지 말자. 요트주인은 계속 요트주인이고 해리는 죽는 사회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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