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군조> 6월 호에 발표한 이 작품은 그 해 <군조> 신인상과 제 75회 아쿠타가와상을 동시 수상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일본 문학의 양대산맥을 이루는 무라카미 류의 처녀작이라 많은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서 읽어 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현재의 명성과는 걸맞지 않게 이 작품이 처음 출간 되었을 때 일본에서는 이 책의 내용이 문학의 소재가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큰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더불어 인간의 내면을 그리지 않았다는 비판과 함께 고뇌와 회한도 담겨있지 않은 작품이라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고 하는데 청춘들의 끝모를 비애를 느낀 건 비단 나를 비롯한 소수 뿐이었다는 말이 되나.

1970년대 이 작품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엔 무려 19세 미만 구독 불가 판정을 받으며 읽어서는 안 되는 금서 취급을 당했다. 나는 사람들이 성과 약 묘사에만 눈을 번뜩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29년 전 내가 아무런 자각을 포함시키지 않고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상실감'이다. 1970년대 중반 일본은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뤄 내고 그 대신에 무엇인가를 잃었다. 이뤄낸 것, 그것은 일본의 고유의 문화를 위한 것은 아니었고..." 그들의 방탕한 생활에 손가락질 하고 고개 돌려버리는 사람들은 내가 확신하는데, 그들의 상실감 따위 제 알바 아니다.

독자는 청춘을 허비한 이들의 당시 일본 사회 시대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책이 출간되었을 당시 일본은 고도의 경제 성장과 동시에 무섭게 침투한 미국의 대중 문화로 인해 큰 쇼크를 먹었다. 미국 음악을 틀고 패션을 모방하면서 자신들을 '노란 인형'으로 취급하는 미군을 따라했다. 나라는 더욱 풍요로워졌지만 국민의 인간성을 돌볼 여력은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무라카미 류가 이 작품에서 방황하는 이들을 통해 무분별하게 미국 문화를 받아들이는 사회를 나타내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와는 다르게 너무 '현실적'이라는 평을 받는 작가 답지 않은가.

너무나 첨예한 그의 글이 일부는 쉽게 읽히지 않아 싫다고 말하지만 담아야만 하는 이야기를 거리낌없이 이야기로 풀어내는 작가는 흔치 않다고 본다. ('자극적인 소재를 사용한 책을 애장하고 있어요.'라고까진 말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책은 무려 작가가 23살에 발표한 것이다.
처절한 한 때를 보내고 있는 류의 또래를 누구보다 잘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 격변의 시기에 자신의 소리를 낸 것과 작품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음악에 대한 방대한 지식이 작품이 작가를 잘 만났구나, 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와 같은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이 만약 우리나라에서 영화화 된다면 거침없이 파국을 향해 치닫는 이들을 위한 청춘 영화가 되어 퇴폐미 신드롬 같은걸 불러올텐데.

반응형

 

책을 읽기 전 책 뒷 장에 간략하게 쓰여진 책 소개를 먼저 읽고 나는 처음부터 그녀를 떠올렸다.

정의, 올바른 것.

 

 

그것으로 인해 상처 받는 타인의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는 냉혈한.

책 속의 노리코는 도를 넘는 정도였지만 내가 떠올린 그녀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싶을 뿐이지 충분히 도를 넘어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 아니, 어쩌면 어느 부분에서는 노리코보다 더 악할지도 모른다.
노리코는 아예 융통성이라고는 배제하고 모든 것에 정의를 가져다 댔지만, 그녀는 올바른 행동을 하면서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한 상황이 올 것 같으면 기지를 발휘해 융통성 있는 행동을 해 보이곤 했다. 자기는 늘 피해받지 않고, 빠져나갈 구실을 만들어 놓았다.
노리코는 자신의 딸이 잘못을 해도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딸보다 정의의 손을 들었지만, 그녀는 정의고 나발이고 자기에게 피해가 오지 않는 선택을 할 것 같다.
어쩌면 일반적인 사람의 행동이고 당연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그녀에게는 '남에게 상처를 주는 한이 있더라도'라는 전제가 붙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긴 시간 그런 행동을 하면서도 머리가 똑똑해서 절대 실수 한 번 하지 않는 그녀가 나는 진절머리 나게 싫었다.

노리코와 같은 사람과는 하루라도 빨리 연을 끊는게 낫다.

다른 네 명처럼 노리코와 같은 그녀를 죽이고 싶은 악의를 품게 될 지도 모르니까.

 

 

원인 제공은 노리코가 했는데 속앓이를 하는 건 네 명의 친구이고 그녀들은 평생을 답답함과 억울함에 가슴을 치며 살아야 한다. 최대한 빨리 그 지독한 악연을 끊어야 한다.


책에서 발췌
내 생각


"나였으면 바로 남자의 손을 붙잡아 비튼 다음 '여기 치한 있어요!'하고 사람들 보라고 소리쳤을 거야."라며 호언장담 했던 가즈키였지만 정작 자신이 그 입장이 되자 몸이 경직되어 움직일 수 없었다. 성추행을 당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깊은 죄책감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 상태에서 소리 지르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 '성추행을 당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부끄러워서'라는 부분을 여러 번 읽었다. 이제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었다. 성추행을 당하는 피해자는 왜 부끄러워 지는걸까. 이유가 뭘까. 왜 그런 상태에서 당당하게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몸이 굳어버리는걸까. 잘 모르겠다. 깊이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단죄하고 나면 뇌의 쾌락을 담당하는 부위가 활성화하여 마약을 했을 때와 비슷한 쾌감을 얻는다고 한다.
= 타인에 대한 인정이 결여되었을 때 나올 수 있는 행동인 것 같다. 하지만 정의라는 이름으로 사회는 고발자를 감싸주므로 사람들은 오늘도 누군가를 단죄한다. 당당하고 떳떳한 모습으로.

 

 

하라 야스히사의 만화 [킹덤] 46권에서 중국 초나라의 사상가 이사는 "법이란 희망이며, 국가가 그 국민에게 희망하는 인간의 바람직한 모습을 이상적인 형태로 만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희망'이 없이 무조건 '정의'만을 외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폭력입니다. 그래서 노리코가 외치는 '정의'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타인을 규탄하는 구실로만 존재합니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