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보는 작가의 조금은 흔한 제목. 큰 기대 않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읽으면서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을 몇 번이나 참아야 했어요. 마지막에 가서는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담아야 했고요. 오랜만에 참 좋은 소설을 만났습니다. 소설책을 그리 많이 읽는데 누군가 소설 추천을 해달라고 하면 적당한 게 떠오르지 않아 난감할 때가 종종 있었어요. 이젠 주저 않고 이 책을 추천할 것입니다.

내용(스포주의)

 



아사토는 사토코 부부의 소중한 아이에요. 6살이고, 평범하게 유치원에 다녀요. 사토코 부부는 아사토를 무척 사랑하고 아끼며 보호해줘요.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어요. 유치원에서 전화가 온 거예요. 받아보니 아사토가 친한 친구 한 명을 정글짐 위에서 밀어버렸대요. 그래서 그 친구는 다리에 깁스를 하게 되는데요. 선생님의 말을 들어보니 등떠밀림을 당한 아이의 입에서 아사토의 이름이 나왔을 뿐 아사토는 친구를 밀지 않았다네요. 몇 번을 물어봐도 아사토는 밀지 않았대요.

그래서 사토코는 아사토를 믿어요. 드세고 교양이 부족해 보이는 친구의 엄마가 자연스럽게 치료비를 요구할 때에도 사토코는 아사토의 말을 믿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아요. 그로인해 그 친구의 엄마에게, 그 친구의 엄마가 소문을 내고 다니는 아사토 친구 엄마들에게도 곱지 못한 시선을 받게 되는데요. 그래도 사토코는 끝까지 아사토를 믿어요. 아사토가 "그냥 내가 밀었다고 할까?" 라고 말을 할 때에도요.

다행히 친구가 실토를 했어요. 정글짐 위에서 자신의 엄마가 하지 말라던 뛰기를 해서 혼날 것이 두려워 사토코에게 밀림을 당해 떨어진 것이라고 거짓말 했다고. 친구 엄마는 울며 사과를 해요.

사토코도 사실 마음 속으로는 실은 아사토가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하고, 그냥 사과하고 끝낼까 생각도 했어요. 하지만 그럼 아사토가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이럴 때 아이를 믿어줄 사람은 다름아닌 부모라는 생각에 사토코는 끝까지 아사토를 믿어주었어요.

이건 하나의 일화예요. 이렇게 아이를 믿고, 아끼는 엄마의 마음을 보여주는 일화. 사실 사토코네 집엔 비밀이 하나 있는데요.





사토코 부부는 불임 치료를 오래 받았어요. 하지만 결국 부부는 아기를 가질 수 없다는 걸 깨달아요. 몹시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장면 장면엔 저도 심경이 복잡해졌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티비에서 특별 양자 결연 프로그램을 보게 돼요.

양자 결연



아기를 낳았는데 아기를 키울 수 없는 환경의 부모가, 아기를 낳을 수 없지만 아기를 기를 수 있는 환경을 갖춘 의지가 있는 부모에게 입양을 보냅니다.

하루는 양자 결연 설명회를 연다고 하여 아기를 원하는 예비 부모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는데요. 이런 저런 설명을 듣다가 문득 한 남자가 손을 들고 말해요. 입양을 할 수 있는 부모의 나이 얘기가 나왔거든요. 입양을 할 수 있는 부모의 나이는 40살이 최대라는 말에 손을 든 거예요.

마른 남자의 울대뼈가 떨렸다. "나이 많은 부모의 육아는" 하고 가는 목소리로 계속했다.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십 대라서 좋은 면도 많지 않겠습니까? 경제적인 면이나 경험이 풍부하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그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저희는 지금껏 수많은 곳에서 연령 제한을 당했습니다." 조용한 실내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구체적인 말을 하지 않아도 설명회에 참석한 많은 부부들이 자신이 더듬어 온 길의 어떤 장면을 떠올리고 있다는 것이 전해졌다.


이 남자는 마흔 몇 살이었어요. 위의 말처럼 나이가 많으면 경제적으로 그리고 풍부한 경험을 통해 아이에게 인생 선배로서 들려줄 이야기가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육아에서 체력을 빼놓고 얘기하기는 어려워요. 나이가 들면 젊었을 때의 혈기를 잃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장점이 있는 반면 단점도 존재하는지라 나이 많은 부모의 입양에 대해서는 남자의 말에도 공감이 갔고 동시에...

"특별 양자 결연은 부모를 위한 제도가 아닙니다. 아이를 원하는 부모가 아이를 찾기 위함이 아니라, 아이가 부모를 찾기 위한 겁니다. 모든 활동은 아이의 복지를 위해 그 아이에게 필요한 환경을 제공하기 위한 겁니다." 그녀는 단언했다. "최우선으로 삼는 것은 아이의 생명을 지키는 겁니다. 태어난 아이의 심신이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는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말에도 공감이 갔어요. 사실 입양에 있어 일 순위는 아이여야 함이 맞는 것 같아요. 하지만 사토코 부부도 그렇고 남자의 말에서도 그간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알 수 있어서 마음이 아팠어요.

사토코 부부는 이 양자 결연 제도를 통해 자식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생모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원칙상 그러면 안되지만 생모가 원하고, 또 양부모가 동의하면 딱 한 번 만나 서로 인사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어요. 사토코 부부는 아이의 엄마를 만나러 갑니다.

그들은 깜짝 놀라요. 이십대 초반도 고등학생도 아닌 중학생이 그 자리에 부모님과 함께 앉아있었거든요. 그 엄마는 엄마가 될 사람의 손을 잡고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이 아이를 잘 부탁합니다." 연신 인사를 했어요.

중학생 히카리는


엄격하고 청결한 집안 분위기가 싫어요. 부모님은 착하고 공부 잘하는 딸의 이미지를 만들어 놓고 그녀를 그 안에 집어 넣으려 애를 써요. 하지만 히카리는 들어가기를 거부하죠. 부모님은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화를 내요. 그 무렵 히카리는 첫 남자친구를 사귀게 되는데요. 깨끗하고 엄격한 부모에게 복수라도 하듯 히카리는 피임도 하지 않고 관계를 해버려요.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남자친구를 좋아하기도 했고 뭐, 그 때까지만해도 남자친구도 히카리를 좋아했어요.

어느 날, 남자친구와 레스토랑에 갔는데 음식이 맛없게 느껴지고 화장실에 갔더니 메스꺼운 느낌이 드는거예요. 히카리는 교제 중 임신이 되었어요. 이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수술을 할 수 있는 기간을 지나 원하든 원치 않든 아기를 낳을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요.

엄마는 불같이 화를 냈어요. 그리고 아빠와 엄마, 언니, 히카리가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히카리의 일을 히카리에게는 묻지 않고 다같이 앞으로에 대해 상의 해요. 이야기는 입양으로 흘러갑니다. 히카리는 싫다고 해요. 하지만 뭐가 싫은건지, 싫다면 앞으로 어떻게 할건지에 대한 계획과 확신은 당연히 없어요.

배가 불러오기 때문에 학교에는 적당히 둘러대고, 입양 센터에서 지원하는 기숙사에 숙식하며 출산을 기다립니다.

그 만화는 일례로, 찾아보니 비슷한 패턴의 이야기가 여기저기 많이 있었다. 이야기마다 '피임할 것'을 권하고, 그렇게 하지 않은 경우에는 남자친구가 도망가서 중절하게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히카리는 그 이야기들을 현실감 없이 읽었다. 자신은 이렇게 되지 않을 건데, 과하게 협박하는 내용은 어른들이 머리로 생각한 스토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드시 '중절'에 이르는 스토리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바로 임신을 알아차리고 주변 어른들을 끌어들여 마음이 흔들린다. 거기에는 히카리가 필요로 하는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임신해도 바로 배가 불러오지 않는다는 것. 첫 생리가 오기도 전에 임신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 중절이 불가능한 여섯 달이 지나도 본인이 알아차리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 등은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히카리는 어른들을 비웃었죠. 청결하고 성실하게 사는 어른들을. 하지만 히카리만의 잘못이라기엔 그는 너무 어리고 어리숙했어요. 다들 그런 시기가 있었잖아요. 저는 성교육도 교육이기 때문에 놓치고 지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부모나 교사가 가르쳐 줘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아이는 친구나 인터넷에서 잘못된 정보를 얻을 수도 있어요. 잘못된 행위에 대한 댓가가 큰 일이기 때문에 정확한 정보를 눈높이에 맞춰 반드시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부모의 도움을 받기 어려운 아이들은 교육기관이나 책 등에서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친절한 안내가 더 많아져야 할 것 같아요.

출산 후


히카리의 남자친구는 중간에서 부모님이 뭐라고 말씀을 하셨는진 몰라도 히카리가 아기를 낳지 않았다고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제 그만 그녀와 이별하고 싶어해요. 히카리는 슬펐어요. 그에게는 이번 일이 하나의 해프닝 혹은 추억으로 남겠지만 그녀에게는 뼈저리게 아픈 일상이었거든요. 그가 훗날 무용담처럼 얘기할만한 일이, 그녀에게는 아니었거든요. 히카리는 배신감과 크나큰 허탈함을 안고 돌아서요.

시간이 흘러 히카리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갑니다. 하지만 이 역시 엄마의 성에 차지 않았어요. 더 좋은 학교에 갔으면, 하고 바랐거든요. 히카리는 이제 가출을 결심해요.

가출


허나 갈 데가 있나요? 선택지는 단 하나. 출산을 하기까지 머물렀던 기숙사에 가요. 그리고 여기에서 일을 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담당자는 다행히 좋은 사람이어서 부모님께 연락을 드린 후 허락을 받으면 일을 하게 해준다고 해요. 그리고 예상 외로 히카리는 허락을 받아요. 히카리 말로 부모님은 이제 자신을 포기한 것 같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곧 양자 결연 단체가 사라지기 때문에 기숙사도 문을 닫아야 할 처지에 놓이게 돼요. 히카리는 담당자에게 소개 받은 다른 일을 하러 또 여정을 떠나게 됩니다.

 

신문 배급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외롭고 혹독한 일. 하지만 히카리는 성실하게 일해요. 그런데 이 곳은 아무나 일하러 왔다가 인사도 하지 않고 갑자기 무단결근 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곳이었어요. 한 여자가 일을 하러 오는데요. 행색이 너저분하고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져있는 듯 보이는 여자였다고 묘사할게요. 그 여자는 처음엔 히카리와 잘 지냈어요. 그래서 히카리가 마음을 놓고 그간 있었던 일을 말해버리고 마는데, 그 후 여자는 히카리에게 돈을 빌리고 갚다가 안 갚다가를 반복해요. 그리고 어느 날, 누군가에게 맞은 듯한 모습으로 히카리에게 보증을 좀 서줄 수 있겠느냐고 하는데요. 히카리는 거절해요.

"도장도 내 것이 아니에요. 이런 건 어디서든 살 수 있잖아요. 필적도 감정하면.", "히카리 짱. 그런데 말이다, 이건 네 이름이야." "그래도" 그때. 양복 차림의 나이 많은 남자가 슬그머니 오더니 테이블을 걷어찼다. 쾅 하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히카리의 눈앞에서 테이블이 솟구쳐 올랐다. 남자는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깨가 흠칫거려서 입도 뻥긋할 수가 없었다. 남자가 조용히 히카리를 내려다보았다. 눈빛이 싸늘했다. "돈 갚을 만한 일자리를 찾아줄 테니 언제든지 연락해." 히카리는 떨고 있었다. 이건 분명히 이상하다,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데도 마치 가위눌린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수금이나 구독 권유로 남자들의 노골적인 시선을 받아 왔다. 그것은 상당히 여유로운 축에 속하며 상냥한 시선이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여자로서의 자신에게도 관심이 없고 단순한 폭력과 무자비함밖에 없는 이런 눈빛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여자로서 관심이 없을 텐데도 그 싸늘한 눈빛은 마치 히카리를 상품처럼 보고 있었다. 남자가 말한 '돈 갚을 만한 일자리'에 짚이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


하지만 히카리가 서명했다는 종이를 가지고 웬 남자가 등장하죠. 여자는 이미 도망간 후고요. 히카리는 이후 남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요. 몇 번이나 아니라고 했지만, 남자는 믿어주지 않았어요.

그 때 히카리에게 보호자가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함께 법의 힘을 빌리려고 도모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히카리는 보호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고, 누구보다 나약한 존재로 비춰졌기 때문에 남자는 어쩔거냔식으로 히카리를 궁지로 몰아넣어요. 일자리를 바꿔 도망쳐 왔는데도 쫓아와서 돈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히카리는 질려버려요. 그래서 가게의 돈을 훔쳐 남자에게 갖다줘요. 보증을 서지도 않았고, 자신이 빌리지도 않은 돈을.

두려웠다. 궁지에 몰렸고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 공포와 끝까지 내몰린 심정을 부디 다른 사람도 알 수 있도록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싶지만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남자들과 히카리 사이에는 조리 있게 말로 따지는 상식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
그런데 어떻게 했어야 옳았다는 걸까. 하마노는 자기한테 왜 상담하지 않았느냐고 했다. 그 말대로 상담하지 않은 쪽은 히카리다. 하지만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왜냐하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갚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쳐 주지 않았다.


히카리에게 보호자가 있었더라면. 가족, 친구, 친척, 연인... 그 중 하나라도 곁을 지켜주었더라면. 히카리는 남의 돈을 갖다 줬기 때문에 이제 그 돈을 갚아야 해요. 그런데 어디서, 어떻게요?

 

 

 

6년만의 재회


히카리는 사토코 부부를 찾아가요. 기숙사에서 나올 때 우연히 자신의 서류를 봤거든요. 양부모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전화번호까지 모조리 외워두었어요. 그래서 찾아가기 전, 몇 번씩 전화를 걸기도 했어요. 물론 이 쪽에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요. 한 번, 자신이 낳은 그 아이가 전화를 받았을 때 히카리는 멈칫해요. 히카리는 사토코 부부의 아파트 앞에서 이렇게 좋은 집에서, 내가 낳은 아이를 데리고,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도 되는거냐고. 뻔뻔한 사람들 아닌가 하는 생각에 분노해요. 당시 히카리는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아이를 돌려주세요.

 



제가 낳은 아이니까 돌려달라고. 돌려줄 수 없다면 돈이라도 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얼굴을 보고 이야기 할 날짜를 잡아요. 히카리는 사토코 부부의 집으로 오게 됩니다. 그런데 히카리는 생각지도 못한 일을 겪게 돼요.

사토코 부부가 화가 났어요. 당연하죠. 그런데 화가 난 이유는 우리 아들의 엄마, 내 아들을 낳아준 우리의 엄마를 그녀가 모독하고 있음에 화가 난 거였어요. 아들의 생모는 아이를 우리에게 건넬 때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잘 부탁한다고 거듭 부탁을 했었는데, 이렇게 아이와 돈을 엮어 얘기 할 사람이 아니라고요. 사토코 부부는 몹시 불쾌해 했어요.

"아이 엄마가 자금의 아사토를 만나고 싶어 하거나 아사토를 도로 데려가고 싶어 하는 거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돈 이야기가 나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요. 아이의... 우리의 엄마는 그런 말을 꺼낼 사람이 아니에요."

 

 


당신은 도대체 누구냐는 대화를 하고 있던 중, 아사토가 유치원에서 돌아옵니다.

아사토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히카리는 무너지고 말아요. 그리고 사토코 부부 앞에 머리를 처박고 죄송하다고. 저는 아이의 생모가 아니라고 사과해요.

히카리는 임신 중에 아사토와 바다를 보았어요. 꼬맹아, 하고 불렀고요. 보호하듯 손을 얹고 함께 걸었어요. "이제 얼마 안 남았어. 힘내자"라고 말했어요. 너와 바다를 본 이 순간을 오래 오래 기억하겠다고. 히카리는 다짐 했었어요. 히카리에게 아사토는 그런 존재에요. 입양을 보냈지만 소중한 존재. 행복을 깨뜨리고 싶지 않은 존재.

그리고 히카리는 사토코 부부와의 대화를 통해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했지만 그 집에서는 버림받지 않고 보살핌 받는 존재로 함께 살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비참해야 함에도 편안한 마음이 돼요.

하지만 허한 마음이 채워지진 않죠. 히카리는 사토코 부부의 집에서 나와 이대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돈을 갚으라고 재촉 당하지 않는 곳, 범죄 혐의를 받지 않는 곳, 부모님에게 절망을 안기지 않는 곳으로. 멍하니 육교 위에서 아래를 흘러가는 차량을 봐요. 그렇게 저녁이 되고 해가 저물었나 싶을 무렵, 하늘에서 천둥 치는 소리가 나요. 두껍고 낮게 깔린 구름 너머로 울리던 천둥소리가 가까워지고, 갑자기 쏟아진 비는 히카리의 온 몸을 순식간에 적십니다. 이대로.

그 때 누군가 갑자기 등을 탁 하고 쳐요. 언제 어디부터 달려왔는지 모를 사토코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드디어 찾았다."라고. 그리고 히카리에게 몸을 기댄 채 서 있는 아사토도 보이고요. 사토코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어요. 비에 젖어 이마에 앞머리가 들러붙어 있었어요.

"정말 미안해요.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쫓아 보내서. 미안해요, 알아보지도 못하고."

 



아사토 앞에서 한껏 예민해지는 촉이 그녀를 알아보게 만들었던걸까요. 누구냐고 묻는 아들에게 사토코는 "아사토의 '히로시마 엄마'야." 라고 얘기해요. 사토코는 평소에 입양을 했다는 사실과 낳아준 엄마는 히로시마(아사토가 태어난 곳)에 있다는 얘기를 줄곧 해왔었거든요. 사토코는 히카리를 아사토의 엄마가 아니라고 단언했을 때와 똑같이, 주저도 망설임도 없이 얘기해요.

비가 차츰 잦아들더니 빗줄기가 점점 가늘어져요. 빛나는 빗 속에서, 아사토의 맑은 두 눈이 두 엄마를 바라봐요.





저는 이 책을 통해 입양 가정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어요. 작가는 책을 쓰기 위해 실제 입양 가정을 취재하고 자료를 조사했다고 해요. 실제 입양 가정 중에선 입양 사실을 숨기지 않고, 사람들은 생모를 질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를 낳아 준 덕분에 입양할 수 있었다며 생모까지 포함해 한 가족으로 여기는 집이 의외로 많다고 하네요.

오랜 불임 치료 끝 축복처럼 품에 온 아이. 사토코 부부는 히카리에게 빛을 받았어요. 그리고 빛을 잃어버린 히카리에게 사토코 부부는 그녀를 마음속에서 보호하며 혈연보다 단단한 또 하나의 가족을 만드는 것으로 또 다른 빛을 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히카리는 낳아 준 부모님과의 관계가 붕괴되어 연락도 하지 않고 살아요. 세상에는 크기도 색깔도 모두 제각각인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있죠. 내가 아는 게 전부라고 착각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새삼스레 했어요.

입양을 하는 입장 그리고 아이를 보낼 수 밖에 없는 입장 모두에 이입을 해서 생각을 해볼 수 있었던 책입니다. 올해들어 가장 흥미롭게 본 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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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외롭거나 슬퍼서 견딜 수 없을 때,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게 그 감정을 배출한다. 약자는 그 배출구로 희생된다. 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괴로울 때 자신이 만든 세계로 도망쳐 들어간다. 그리고 자신의 주관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보고 듣고 기억하는 일들을 제멋대로 비틀어버린다. 이 소설은 그처럼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이 책에서는 일단 사람을 죽이고, 그 몸을 운반하고, 다리를 꺾거나 입에 비누를 넣는 등 괴상망측한 행동을 일상처럼 일삼고 환생, 학대, 이상성욕, 트라우마 등 무거운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 점 인지하고 읽는 편이 좋겠습니다. *오늘도 스포주의*





주인공 미치오는 집에 유인물을 가져다주라는 이와무라 선생님의 부탁에 S의 집으로 가요. 하지만 거기엔 목을 길게 빼고 스스로 죽음을 택한 S의 모습이 기다리고 있었죠. 미치오는 다시 학교로 가 선생님께 이 사실을 알립니다. 그리고 선생님, 형사 두 명과 함께 집에 가니 S의 몸은 감쪽같이 사라져 있는데요. 대체 누가 가지고 간 것일까요?

 

누군가 미치오에게 말을 걸어요. "미치오!" 말을 한 사람, 아니 곤충은 다름아닌 거미였어요. 거미는 자신이 S라고 소개를 해요. 거미로 환생을 했대요. 그리고 미치오에게 부탁해요. 자신의 몸을 찾아달라고.

 

 



S와 미치오 그리고 세살배기 미치오의 동생 미카는 꽤 열심히 범인색출에 몰두합니다. 그들이 주목한 범인은 이와무라 선생님이었는데요. S의 제안으로 그들은 이와무라 선생님의 집에 몰래 침입하는 것에까지 성공해요. S의 몸을 이와무라 선생님이 가져갔을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러나 거기서 본 것은 그들이 예상치 못한 것이었어요. 어린 남학생들의 사진, 싫다고는 하지만 진짜 싫어하는 것 같진 않은 비디오 속 알몸의 S모습. 미치오는 혼란스러워합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S가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지는 않음을 인식하고 의심을 하고 또 싸우기도 해요.

S의 집 가까이에 다이조 라는 할아버지가 살아요. 다이조는 우연히 만난 미치오에게 이와무라 선생님이 쓴 자신의 뒤틀린 욕망이 담긴 책의 존재를 알려줘요. 자신의 그릇된 욕망이 세상에 드러날까 두려워 S를 죽인 게 아닐까, 미치오는 이제 거의 확신해요. 그래서 형사에게 언제 밀고를 할지 기회만 엿봐요. 그런데 진짜 이와무라 선생님이 범인일까요?





1️⃣ S
죽은 뒤 거미로 환생한 아이. 심한 사시에, 어머니와 살고 있어요. 학교에서는 따돌림을 당했어요. 아이들은 노골적으로 S에게 다가오기를 꺼려했죠. 지나가는 아이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칼처럼 날카롭게 느껴졌을까 안타까웠어요.

억울하고 억눌린 감정을 분출 할 방도가 없는 S는 결국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맙니다. 힘없는 개와 고양이를 노려 그들을 죽이는 거요. S가 살고 있는 N마을에서는 개와 고양이가 죽임을 당한 후 입엔 비누, 다리는 반대로 꺾여 있는 괴상한 사건이 9번이나 발생해요. 그런데 S는 죽이기만 했을 뿐 다리를 부러뜨리지는 않았다네요?

S가 죽인 동물의 다리를 부러뜨린 사람은 다리를 부러뜨리다 우연히 창문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S와 눈이 마주쳐요. 그 때 S는 동정과 안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고 합니다. '나와 똑같은 사람이 또 있구나.' 동질감을 느낀 것 같기도 해요. 그 후로 S는 먼저 몹쓸 짓을 하고 그 사람을 위해 지도에 자리 표시를 해 그 사람 집 앞에 놓아둡니다. 그게 그 사람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거예요.

S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데요. 이마저도 그 사람에게 알려줍니다. 마음이 얼마나 지옥같았으면 그런 행위를 하고, 끝까지 그런 걸 우정이랍시고 주다니. 하지만 따돌림을 당해 억울했던 S처럼 이유없이 죽은 동물들도 힘들고 슬펐겠죠. 그저 9개의 에피소드로 치부하고 넘어간 게 아쉬워요.

 

 



2️⃣ S의 어머니
아들의 죽음을 슬퍼합니다. 그런데 둘이 어떠한 시간을 보냈는지 장면이 하나도 나오지 않아서 'S의 엄마가 뭔가를 숨기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다행히 그런 건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S가 부모에게 받은 사랑이 턱없이 부족했음을 작가가 그렇게 전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나 싶어요.

3️⃣ 도코할머니
미치오가 고민상담을 하러 가는 따뜻한 할머니에요. 미치오가 뭔가를 부탁하면 도코할머니는 이상한 주문을 외운 후 실마리가 될 힌트를 꼭 알려주세요. 이번에도 '에이고(냄새)'라는 키워드를 알려주셔서 큰 도움이 되었지요. 하지만 슬프게도 어느 날 도코할머니는 개와 고양이가 죽임을 당했던 것처럼 끔찍한 일을 당해요. 과연 누가 그런걸까요.

4️⃣ 다이조 할아버지
다이조 할아버지가 그랬어요. 근데 다이조 할아버지는 몰랐대요. 집에 찾아오는 삼색고양이가 도코할머니일 줄. 도코할머니가 환생하여 고양이가 된 거였더라고요. S가 죽고 더 이상 부러뜨릴 것이 없자 정이 들었던 고양이에게 몹쓸 짓을 해버린 다이조.

S가 지도를 준 사람은 다이조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왜 다이조는 다리를 부러뜨릴까요?

어릴 적, 엄마가 돌아가시자 이웃집 아줌마들은 엄마를 둘러싸고 엄마의 다리를 부러뜨렸어요. 그 중 한 아줌마와 눈이 마주치고 다이조는 패닉 상태로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마는데요. 그게 실은 장례절차 중 하나였거든요. 아줌마들이 악의가 있어서 그랬던 게 아니라. 다이조는 엄마가 아줌마의 남편들과 밤늦게 어울려서 아줌마들이 복수를 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어느 날, 다이조는 엄마의 관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발견합니다. 다이조는 아줌마들에게 한을 품은 엄마가 관 안에서 스스로 나왔다고 생각했어요.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개가 끌고 갔나 그래요.) 그리고 하필이면 엄마의 다리를 부러뜨린 아줌마가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해 해를 입는 일이 발생해, 다이조는 엄마에게 엄청난 공포를 느끼고 맙니다.

노인이 된 다이조 앞에 하루는 뺑소니를 당한 한 여학생이 눈에 띄었어요. "용서하지 않을거야." 다이조를 뺑소니범이라고 오해한 여학생이 말해요. 다이조는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입니다. 그리고 엄마가 그랬듯 이 여학생이 나중에 관에서 나와 자신에게 복수를 하지 못하게 그 때 그 아줌마들처럼 다리를 부러뜨려요.

죄책감을 가지면서도 S에게 건네받은 지도의 장소에 가 매번 똑같은 짓을 저지릅니다. 다이조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인물이죠. 극심한 트라우마에 일흔이 될 때까지 시달리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또한 소중한 동물들의 생명을 앗아간 데에 대한 면죄부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무고한 다른 생명을 해치면 안되죠.

 

 



5️⃣ 미치오
미치오는 초등학생임에도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가여운 아이예요. 어렸을 때 엄마를 깜짝 놀래켜주고 싶어 했던 장난이 엄마 뱃속에 있던 아기를 유산시키는 결과를 낳은 후 엄마에겐 투명인간보다 못 한 취급을 받아요. 엄마는 항상 미카만 찾아요. 미치오의 동생이요.

그 일이 있은 후 엄마는 다시는 임신을 못 하는 몸이 되었는데 어떻게 미카를 낳았을까요? 엄마는 인형을 보고 미카라고 부르고, 미치오는 도마뱀을 보고 미카라고 불러요. 둘 다 정신병에 걸린거예요.

미치오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 라며 미카를 부러워 합니다. 아빠는 늘 피곤한 눈을 한 그냥 함께 생활하는 사람이에요. 미치오의 엄마가 미치오에게 퍼붓는 악담은 상상을 초월하는데요. 미치오가 기분 나쁜 것을 보았다고 하자 '너보다 기분 나쁘니?', S사건의 목격자라는 걸 알게 됐을 땐, '이번에도 네가 죽였지?' 하지만 미치오는 순한 양처럼 그 자리를 뜨거나 담담히 받아들일 뿐이었어요.

미치오는 거미가 된 S, 도마뱀이 된 미카, 고양이가 된 도코할머니, 곱등이가 된 다이조 할아버지를 병에 넣고 돌봐주어요. 모두 외로움과 공허함이 만들어 낸 것들입니다.

이야기 후반부에 다이조 할아버지를 무섭게 몰아부치는 미치오의 분노가 인상적인데요. 그게 그 아이의 본모습이 아닐까 싶었어요. 그리고 사실 S는 미치오 때문에 죽었답니다. 학교에서 연극을 하기로 했는데 미치오는 연극이 하기 싫어서 S의 집에 가서 S에게 죽어주면 안 되겠냐고 했어요. 그 말을 듣고 S는 그렇게 된 것이고요. 미치오는 왜 이런 아이가 된걸까요.


"저뿐만이 아니에요.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 속에 있잖아요. 자신만의 이야기 속에요. 그리고 그 이야기는 항상 뭔가를 숨기려고 하고, 또 잊으려고 하잖아요."


저는 부모에게 원인이 있다고 생각해요. 한참 사랑을 받아도 모자랄 나이에 무시를 당하고 인정받지 못해서 얼마나 서글프고 화가나고 원망스러웠겠어요. 사람이 사람답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사랑이 필수인데 말이에요. 아이에게 부모는 신이라고 하잖아요. 신이 자신을 외면해버리면... 거기다 미치오의 신은 미치오에게 악담을 퍼부었어요.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이 들었겠죠. 그래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 도피했던거고.

슈스케의 소설에는 인간의 생각과 착각, 잘못 듣는 것들이 진상을 가로막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등장한다. 우리 인간이 사소한 생각에 쉽게 좌우되고, 보지 않았는데 보았다고 생각하고, 하지 않은 행위를 했다고 생각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독자는 인정사정없이 철저히 깨닫게 된다.


늘 생각을 조심해야겠단 생각을 했어요. 내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생각이라고 다 옳은 건 아니라고 누가 그랬는데, 내가 알고 있는 사실도 정말 참인지 객관적으로 따져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 같아요.

저도 제 생각만으로 일, 관계를 그르친 적이 몇 번 있어요. 내 생각이 내 주관에 의해 해석된 것인지 남들이 들어도 납득할 만한 일인지 이제 잘 가려야겠죠.

그나저나 다이조, 미치오의 트라우마가 만든 결과는 그야말로 참혹하네요. 트라우마 관리도 필요한 것 같아요.

끝으로... 이야기가 맥거핀으로 이용만 되고 스르르 사라져버린 것이 있어요. 이와무라 선생님의 악취미. 어린 아이들을 상대로 그런 짓을 하는 건 악질 중에 악질이죠. 그것도 선생님이. 근데 책에서는 이와무라 선생님이 범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그 내용도 자연스럽게 묻혀졌어요. 생각할거리나 교훈을 주었으면 좋았을텐데 아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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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회 보일드 에그즈 신인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전직 만화가 지망생이었던 저자를 한껏 녹여낸 듯한 여주인공이 25살의 나이에도 불구 여전히 소녀같은 이유는 도쿠나가 케이가 순수한 감성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순정 만화 여자 주인공과 마흔 여섯살 아저씨가 실제로 눈 앞에 팔랑거리는 것 같은 착시를 일으키는데 그래서인지 생동감 넘치는 말과 행동이 여느 책보다 풍부하게 느껴진다.

예를 들어, 산업 스파이 앞에서 발을 헛디뎌 만화 원고가 우수수 쏟아지는 장면이라던가, "인생은 하룻밤의 쇼같은 거리고 생각해" 운전대를 돌리는 그의 무심한 옆모습에서 느껴지는 안정감과 노련한 표정은 의도하지 않아도 저자의 장기가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각자의 비밀을 갖고 같은 공간에서 일하게 된 두 사람이 비록 만화같이 멋스러운 엔딩을 맞이하진 못했지만 소설책 다운 교훈이 고개를 빼꼼히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사의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가짜 센터장으로 부임한 아저씨는, 만화 투고에 열심이지만 매번 고비를 마시는 청춘 소녀에게 흘리듯 격려와 응원을 건넨다.
'아야카, 회사에 들어올 때 매번 오른발부터 밟는 거 알아? 가끔은 왼발부터 밟아도 돼.' 나는 이것이 산업 스파이 주제에 늘 콧노래를 부르고 다니는 유쾌한 아저씨가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믿는 젊은이들에게 조금은 인생을 즐겁게 살아도 된다고 수줍게 이야기 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몽실몽실 했다.
아야카는 그 말에 왼 발을 디뎌 자신의 만화 원고를 A급으로 승급시켰고 자신의 꿈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자신이 한 말을 기억을 할는지 모를 의문의 센터장은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게 끝나버린 이야기에 혹자는 깊은 탄식과 허무함을 느꼈을지 모르겠다.

나는 오랜 기억 속, 순정 만화를 손에 쥐고 울고 울었던 어린 날의 내가 떠올라 은은하고 달콤한 기분으로 책을 덮었다.

생동감 넘치고 어린 아이 같은 사람들이 보고싶다.
지나치게 날카롭거나 과장된 행동으로 사랑받는 인물들.

저자가 실은 아직도 만화가를 꿈꾸고 있다면 의문의 센터장처럼 나도 조용히 그녀를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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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중견 작가 요시다 슈이치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무라카미 류 등에 의해 발전한 일본 '팝 문학'의 정점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작품으로는 '파크 라이프'와 '퍼레이드'등이 있는데 작품들이 차례대로 일본 순수문학을 대표하는 아쿠타가와상과, 대중문학을 대표하는 야마모토 슈고로 상을 수상하면서 대중성과 작품성을 두루 갖춘 작가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사랑에 난폭'을 읽고 간결하면서도 흡입력 있는 문체가 맘에 들어 나는 다음번에도 책을 들테지만, 그 땐 작가의 입장에서 본 솔직한 남자의 심리를 엿보고 싶다.
책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모모코와 내연녀가 번갈아가며 자신의 일기를 공개해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는 건, 남성 작가임에도 대단히 날카로운 시선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대도 욕심이 나는 이유는 순수한 독자 입장에서 사고 원인 제공자 남편 마모루의 우유부단하고 쉽게 정의내릴 수 없는 심리가 너무도 궁금하기 때문이다.
자기 아들 감싸기에 급급한 철없는 시어머니 데루코의 아들이기에 얼렁뚱땅 이해가 되는 식으로 넘어갔지만, 그 나름대로의 복잡한 심경을 어디 한 번 구경이나 해봅시다 싶기도 하고 궁금하다.

대충 느낌이 왔겠지만 이건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를 제목으로 써도 손색이 없는 불륜 막장 스토리를 다룬 소설이다.

 

결혼 8년차 주부 모모코는 자신에게 늘 냉담하기만 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며 살뜰히 남편을 내조하는 전통적인 현대 여성이다. 자신의 특기를 살려 문화센터에서 수제 비누 만들기 강좌를 하고, 오는 길에 찬거리를 사서 시어머니와 남편의 식사를 책임지는 평범한 주부에게 불륜은 그야말로 느닷없는 우박처럼 떨어졌는데, 너무도 평온하였기에, 행복을 깨고 싶지 않았기에 모모코는 당장 눈 앞에 닥친 현실을 부정하기 급급했고 그러는 사이 어느새 그녀는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무서운 여자'가 되어있었다. 남편의 불륜 사실과 동시에 내연녀의 임신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땐 과연 내가 어떻게 대처하는게 옳은 것일까. 만약 내게 그런 불똥이 튄다면…
확실한 건, 나는 모모코와 정반대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내연녀의 존재 자체와 임신 여부는 나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다. 내가 해결할 첫번째 미션은, 마치 혼령처럼 내곁에 떠도는 남편과의 관계를 차근차근 되짚어 나가는 일일 것이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참을 수 없는 관계가 되버린다면 그 무엇이 이유가 되었건 같이 살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편을 사랑하지도, 그렇다고 못마땅해하지도, 시어머니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지도, 그렇다고 모진 구박을 받지도 않았던 모모코에게 결혼생활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친한 옛 직장 동료에게 다시 한 번 회사에 일자리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했지만 회사 여직원들의 험담을 통해 알게 된 직장 동료의 본심을 듣고 낙담해있던 찰나, 자신이 예전에 다녔던 회사보다 낮은 회사에 입사 지원서를 넣어도 기다렸다는 듯 떨어지고야 마는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두려움? 다시 시작하기에 늦은 것 같은 마흔이라는 나이와 결혼과 이혼의 꼬리표? 마흔이라면 나보다 족히 열 살은 더 많은 여자에게 주제 넘게 이 말을 남기고 싶다.
남편과 시어머니마저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누군가를 짓밟고 앞다퉈 달려나가는 시점에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을 갖지 않는건 스스로에게 내리는 형벌과 같다고.
다다미를 들고 흙을 파내 그 안에 들어가 남편과 시어머니의 대화를 들은 것과, 예전에 집에 함께 살았던 시아버지의 어머니, 사람들 말로는 '첩'의 억울함이 폭발한 '방화 사건'에 마음이 움직여 본인도 남의 집 화분에 불을 지르고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으면 그걸로 충분히 됐다고 생각한다.

남편과 내연녀의 죄책감은 몽글몽글 살아있게 냅두고, 모모코는 신선한 새 책의 더 튼튼한 첫 장을 찬란하게 시작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잘 사는것이 최고의 복수라는 말을 피부로 절절히 느끼는 날이 올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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