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패니언' 이라는 직업은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 때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최초의 만국박람회였기에 접객 매너와 어학 능력이 뛰어난 고급 인력들이 별도의 교육을 받은 뒤 국제적인 행사, 사업 부양을 위한 파티에 투입 되었다고.

하지만 '컴패니언' 은 일본의 80년대 거품경제가 꺼지고 난 뒤 그들의 영예도 함께 꺼져서 이제는 가까스로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고 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 교코가 바로 컴패니언이다. 화려한 보석을 좋아하는 교코는 부잣집 남자와 결혼하기 위한 발판으로 이 직업을 이용하고 있는 듯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 작품이 심각한 사회경제적 부조리라는 묵중한 주제를 드러내고 있음에도 끝까지 너무 무거운 분위기로 흘러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교코가 한 몫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녀는 허영심을 대놓고 드러낸다.
 
특히 옆집으로 이사온 형사 시바타에게는 더더욱. 
 


 


그런데 '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 라니, 교코에게 무슨 계획이 있었다는 말인가? 추리소설에서 '계획' 은 영 께름칙한 어감인데, 게다가 형사가 바로 옆집에 산다잖아.
 
이거, 괜찮은걸까?
 
과연 누구에게, 무슨 계획이 있다는걸까.
 

(스포없음)

 
 
 

#1. 에리의 죽음

 
같은 컴패니언으로 활동하던 에리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그녀가 죽은 현장을 보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처럼 보이는데, 시바타 형사와 교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히가시노게이고의 소설 속 주인공 형사는 늘 탐정과도 같은 면모가 돋보인다. 이번에도 역시 범인이 설치해 놓은 덫에 쉽게 걸려들지 않았다.
 

#2. 에리와 연인사이였다고 주장하는 마루모토

 
마루모토, 그에게는 연인이 한 명 더 있었다. 요코. 그렇다면 내연관계인 요코의 존재를 눈치챈 에리가 그로인해 비관적인 자기파괴적 행동을 했다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마루모토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 하고 그를 죽이려다 도리어 본인이 죽어버린 것인가? 마루모토는 에리가 죽은 현장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이기도 하다. 매우 강력한 용의자 선상에 올라있는 중.
 

#3. 교코와 다카미

 
교코는 부자인데다 매너도 좋은 다카미를 좋아한다. 그래서 그와의 약속이라면 일을 빼고서라도 잡으려 한다. 그리고 어쩐일인지 다카미도 교코에게 관심이 있는 듯 하다. 그런데 이상한 건, 교코와 자꾸만 만나려고 하는 다카미가 만날 때마다 에리의 사건을 묻는다는 것이다. 곧 에리의 친한 친구도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는데, 그 사건도 자꾸만 캐묻는 게 이상하다. 다카미는 교코에게 관심이 있는걸까, 사건들에 관심이 있는걸까?
 

#4. 다카미의 전화에서 흘러나온 수상한 여자 목소리

 
다카미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교코가 받은 전화 안에서는 흐느끼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그 여자는 과연 누구였을까?
 

#5. 교코에게 추근덕거리는 겐조

 
겐조는 하나야 가의 셋째 아들이다. ('하나야 가' 는 에리가 죽은 그 날, 컴패니언들이 응대를 했던 전국 보석 체인점이다.) 망나니라고 불리울 정도로 행실이 지독히 튀는 사람으로 모두에게 알려져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교코에게 관심을 보인다. 그녀와 만나고 싶어하고, 그녀와 시간을 함께 하기 위해 교코가 가장 좋아하는 보석을 선물하기도 한다.  
 

#6. 이세

 
죽은 에리의 전연인이다. 이세 역시 죽었다. 에리보다 더 먼저. 이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으로 사건이 종결 되었었는데 아무래도 에리는 무언가 미심쩍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확실한 증거를 손에 넣었거나) 그 후 그녀는 도쿄로 올라온다. 
 
에리는 이세를 많이 사랑했던 것 같다.
 

 

 
 

죽기 전, 이세의 메시지가 큰 힌트가 되었다. 그로인해 에리의 죽음의 비밀도 풀리고, 가해자들의 신상도 마침내 드러나게 되었으니까. 
 
이세가 숨겨놓은 어쩌면 다잉메시지,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이 책이 주는 즐거움 중 하나다. 그의 배후에 누가 있었는지를 알아내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시바타와 교코의 노고, 죽은 유카리의 노력도 빼놓을 수 없겠다.
 

 
 


 

 

문이 굳게 잠긴 방에서 마치 혼자 죽음을 꾸민 것처럼 그려진 현장을 수상하다고 보는 것, 에리와 연인이라고 알려진 마루모토와의 관계 뒤 무언가 에리의 속셈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마침내 그 이유를 희미하게나마 파악하고 그녀의 고향인 나고야에 내려가 그녀의 전연인의 찜찜하게 마무리 된 사건을 재조명 하는 것 등.
 
이 밖에도 '조금 더 얘기해주지' 싶은 부분들이 많았는데 위에 열거한 것들은 그 중에서도 특히 더 아쉬웠던 부분이기에 구태여 남겨본다.
 
에리의 사건을 해결하는 데에는 사실 큰 힌트라기보다 사람의 상상과 직감에 크게 의존했기에 끝에 가서 결국 모두를 골머리 앓게하던 문제가 해결되었을 땐 박수를 치면서 '바로 그거였구나!' 가 아닌, '아... 이거였구나. 이런 방법도 있네' 싶어 다소 싱거운 기분이 드는 게 아쉬웠다. 
 
그리고 에리의 사건을 시작으로 덮어두었던 이세의 일, 다카미가 교코를 만날 때마다 에리의 사건을 물어보던 일들이 그다지 매끄럽다고 느끼지 않았다. (작가가 사건들이라는 퍼즐들을 미리 준비해 둔 뒤 어떻게든 맞춰지게 하려고 무리해서 갈고 다듬고 깎아낸 느낌) 
 
1988년에 발표된 초창기 작품이라니까 이 정도는 감안하고 넘어가주어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지만...
 
내게 이 책은 재미있고 단순한 추리소설이었다. 내 생각을 더하고 자시고 할 건덕지가 없이 재미있고 단순한 추리소설. 그래도 이제까지는 추리물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서 무조건 작가의 의도를 건져냈는데, 이처럼 '내용'과 '재미' 만 담겨있는 소설은 처음인 듯 싶다.   
 
그러니까 재미가 없었다는 뜻은 아닌데,
뭐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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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는 17살입니다.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조부모님 손에 길러졌어요. 하지만 조부모님마저 돌아가시게 되자 경주에게는 이제 함께 살았던 이 집만이 남았습니다.

 


집에 와서 하는 일이라곤 할머니 할아버지 속 긁어놓기, 돈 가져가기 밖에 없었던 삼촌이 찾아옵니다. 이 집 팔자고요. 그런데 왜 그걸 경주한테 말하느냐고요? 조부모님이 경주에게 유산으로 이 집을 남겨주고 가셨기 때문이에요. 비로소 경주가 서류에 도장을 찍어야만 집이 팔리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경주는 집을 팔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조부모님의 마지막 유언이었거든요. 삼촌은 고함을 지르거나 위협을 가하는 등의 방법으로 그녀에게 강요합니다.



"이 집은 절대 안 팝니다."

 

 

 

어디 어른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느냐고, 너는 애가 왜 이렇게 고집이 세냐고, 네가 뭐라 해도 결국 이 집을 팔게 될 거라는 삼촌의 말과 경주의 대답이 핑퐁처럼 최소 열 번 이상은 이어집니다. 경주도 참 대단해요.

 

애 vs. 어른


경주는 열 일곱살입니다. 삼촌은 서른이 넘었고요. 법적으로 한 명은 미성년자고 한 명은 어엿한 성인이지요. 그런데 이들의 태도를 한 번 보세요. '내가 가진 것은 노트북이나 비싼 패딩이 아니고 집이다. 자산이다.' 집을 소유했다는 것을 인지한 후 행동과 말투를 달리하는 이 고등학생. 꼭 필요한 말만 하고, 정확하게 행동하고, 분명한 태도를 보이려고 매사에 주의하는 경주는 어설프나마 어른스럽게 행동하려고 합니다.

대조적으로 삼촌은 상대방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적당히 구슬리면 될 거라고 생각해 철없는 행동을 하지요. 소리를 지르고, 발을 쾅쾅 구르고, 문을 세게 닫고 나가고, 으름장을 놓고, 제 딴에 무서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에요. 경주는 생각합니다.

 

나는 삼촌이 좀 더 지적이고 근사한 방법으로 나를 설득해 주기를 바랐다.

 

 

 

새삼 별스러울 것도 없어요. 세상엔 나잇값 못 하는 사람들 천지니까. 오히려 아이가 더 어른스러울 때가 있기도 하죠. 나이가 어른임을 증명하는 건 진짜 아닌 것 같아요. 어른은 어른답게 행동하고 자신과 남들이 인정해줄 때 붙일 수 있는 말 같습니다.

 

고모와 순지


고모와 그의 자녀 순지가 집에 찾아옵니다. 할머니가 물려주신 아파트를 말아먹고 갈 곳이 없었거든요. 고모도 처음엔 이 집을 팔고 세입자를 들이거나 이 자리에 새 집을 짓자고 설득 해요. 하지만 경주의 의지가 너무나 올곧았기 때문이겠죠. 고모는 적어도 삼촌처럼 끝까지 막무가내는 아니었습니다.

순지는 경주의 친구예요. 그도 처음엔 집을 파는 쪽에 생각이 기울어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삼촌이 저렇게 나오는데 결국은 팔게 되지 않을까, 하고요. 하지만 순지는 그렇게 생각을 했다 하더라도 아무런 힘이 없었어요. 미성년자였으니까요. 그는 종종 경주의 말동무가 되어줍니다.

고모부


경주 입장에서는 매일이 자연재해와 같은 하루 하루였겠지만 독자 입장에선 꽤 순탄한 전개였다고 생각합니다. 고모부가 등장하기 전까지는요.

고모부는 고모와 이혼한 사이예요. 이미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있죠. 그런데 왜 이 집에 찾아온 건지 모르겠어요. 게다가 길진 않지만 이 집에 잠시 잠깐 함께 살 거라네요? 이 집을 팔면 어마어마한 돈이 생기거든요. 정말이지 그 '돈'때문에 나잇값 못 하는 어른들이 하나 둘씩 생겨 나는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스포가 될 수 있겠습니다. 책을 읽으실 예정이신 분들은 이 부분 패스하시길 바라요. 거의 종반부에 고모부는 대단한 결심을 하나 하는데요. 아무리 설득을 하고 겁을 줘도 경주는 눈 하나 깜짝 안 하잖아요, 여기서 정말 못난 행동이 나옵니다. 삼촌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요.

그건 바로 경주를 지하 창고에 가두는 일이었어요. 집 서류를 넘겨주면 문을 열어준다네요. 삼촌은 옆에서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느냐'며 고모부를 말렸지만, 내심 이렇게 해서라도 일이 해결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을거예요. 결국 경주는 하루 반나절 정도를 창고에 갇혀 있게 됩니다.

경주를 꺼내준 사람은 근처에 사는 성이 할머니였어요. 사실 꺼내준 건 아닙니다. 성이 할머니는 경주 할머니가 돌아가신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분이 아니었거든요, 치매에 걸리셔서요. 자주 경주네 집에 와 정원을 손질하고 성이와 함께 돌아가시곤 했죠. 할머니가 창고로 다가가자 성이가 "할머니?"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이었어요.



 

 

그 이후 고모와 고모부, 삼촌은 난리가 납니다. 경주가 듣고 있는지도 모르고 한바탕 말싸움을 해요. 고모는 삼촌에게 말합니다. 경주의 엄마 아빠가 죽은 건 너 때문이라고. 네가 경주의 엄마 아빠를 그 날 하필 불렀기 때문에 보러가다 사고가 난 거라고. 경주의 아빠가 할아버지 눈에 드는 게 네 입장에선 눈엣가시 아니었느냐고 말해요. 삼촌은 아빠가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고 항변했지요.

이 집을 주축으로 경주의 부모님, 조부모님, 삼촌과 고모 등은 불편하게 얽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집도 나름의 비밀을 감추고 있었죠. 할아버지의 친구가 망하는 기회를 이용해 지어진 집이라는 게 삼촌의 단골멘트였어요. 그리고 그 친구가 찾아와 실수로 자신의 팔을 칼로 스쳤을 때 나온 피 때문에, 할아버지가 평생 삼촌의 요구를 들어주고 살아왔다는 사실도 경주는 어른들의 말싸움을 통해 알게 됩니다.

고모부는 지하 창고 사건 이후 집을 나가요. 그 날이 모두에게 전환점이 되어주긴 했나 봐요. 가장 큰 변화는, 삼촌이 달라졌거든요. 아무래도 조카를 창고에 가둔 건 아무리 인간 말종이라도 양심에 찔리는 일이었긴 했나봅니다.

삼촌과 나는 여름의 질서 속에 한참을 고요히 서 있었다. 삼촌이 어깨를 한 번 들썩이더니, 비밀이라도 말하듯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내가 잘못했다." 삼촌은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현관을 향해 돌아섰다.


다행이죠. 그런데 이제까지 경주가 마음 고생한 건 어디서 보상을 받을 수 있나요? 철이 없기로소니 고등학생 조카 앞에서 자신의 철부지 같은 행동을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나 싶습니다.

이 책을 덮고 씁쓸했던 이유는 이 책에 나오는 삼촌, 고모부, 고모 같은 어른들이 상당히 많다는 현실 때문이었어요.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건 저도 누군가에겐 이렇게 지긋지긋한 사람일 지 모른단 사실...)

진짜 어른은 어떤 사람을 일컫는 말일까요? 책에서 경주는 소중한 것을 자신의 소신을 걸고 지켜내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지 않으면서 자신의 뜻을 관철 시키는게 꽤 어른스러워 보이긴 했어요. 책에서 던지는 질문은 아니긴 하지만요. 생각해 볼만한 물음인 것 같아요.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나는 물론이고 타인을 배려해야 한다는 생각이 짙어집니다. 나와 타인에 대한 배려. 이 균형을 맞추는 삶을 살고 싶네요.



 

 

끝으로... 제목에 대해 생각해봤어요. 왜 '나로 만든 집' 일까. 이 집은 말그대로 '경주'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목숨을 걸고라도 지키려고 했던 게 아닐까요? 나는 내 몸도 있지만, 생각도 있고 의지도 있고 신념도 있죠. 경주의 그 모든 것이 이 집을 이루고 있던 것이라고 생각해요. 결국은 아무도 이 집을 허물 수 없었습니다. 경주가 경주를 포기하지 않아서 아무도 허물 수 없었어요. 힘들었겠지만 끝까지 자신의 소리에 귀기울여 준 경주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이 책을 청소년들이 읽는다면, 많은 것을 가지고 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자신의 옳다고 생각되는 소신을 어른들 중에도 나잇값 못 하는 덜 큰 어른들의 말을 듣고 꺾지 마세요. 그저 나이만 먹은 어른들에게 굴복하지 않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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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스포주의)



여기 교육열이 어마무시한 엄마가 계십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들, 쌍둥이를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데요. 어느 날 갑자기 두 아들 중 한 명인 건휘가 스스로 세상과 작별을 고해요. 왜? 영재 소리 듣는, 엄마 말 잘 듣는 착한 아들이 대체 왜?

혼자 남은 아들 선휘는 엄마를 더 미워하게 돼요. 선휘는 형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 누구보다 이유를 잘 알았거든요. 그는 형처럼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다가 나중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건강하게 자신의 감정을 다 표출했죠.

다행히도 선휘의 절규 앞에 엄마는 정신을 차려요. 평생 자신의 신념이 옳은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녀이기에 내려놓기란 아마 쉽지 않았을겁니다. 그런 엄마를 선휘는 이제 용서할 수 있을까요? 그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혼란의 와중에 은빈이라는 친구를 만나 겪게되는 감정선 이야기는 꽤 흐뭇합니다. 건전하고 바람직한 이성관계란 이런 것이다 란 생각이 들더군요.

 

엄마와 아빠



 

집에 티비가 없음은 물론이고 거실의 벽은 책이 빼곡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집에서 쌍둥이들은 오로지 1등을 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요. 엄마를 위해서.

아빠는 바쁘다는 핑계로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아요. 그러던 어느 날 선휘는 목격해요. 정처없이 광장을 배회하는 아빠의 모습을. 엄마의 아이들을 향한 도가 지나친 간섭에도 이렇다할 발언을 하지 못하는 아버지. 엄마로부터 아이들을 지켜줄 힘이 없는 무능력한 아버지. 쌍둥이는 세상에서 가장 편한 곳이어야 하는 집이 지옥 같았을겁니다. (대종이모라는 분이 아이들을 위로 해주었다고 하지만, 엄마와의 대립으로 결국 그녀 또한 집을 나가요.)

한 명이 애를 잡으면 한 명은 말리기라도 해야 하는데 이 집은 아무도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었어요.

그리고 엄마의 공부를 시키는 방법은 참으로 올바르지 못합니다. 1등을 하라고만 가르치기 때문이죠. 그리고 혹여나 성적이 떨어지면 가차없이 매를 들었습니다.


선휘 엄마와 스카이캐슬의 예서 엄마



 

책을 읽으며 문득 스카이캐슬의 예서 엄마가 생각났습니다. 그녀 또한 딸의 의대 진학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선휘 엄마와 예서 엄마, 이 둘에게는 차이점이 하나 있었어요.

예서 엄마는 그래도 아이의 감정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예서가 친구들과 팀을 짜서 공부를 해야 할 때 그 안에 혜나가 있는 걸 알고 엄마에게 짜증을 부리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엄마는 거기에 대고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말을 하지 않아요. 딸이 오죽하면 저럴까 싶어 그 팀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차라리 자신이 다른 학원들을 더 알아보기 시작하죠.

예서가 좋아하는 우주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있었을 때도, 딸이 혼란스러워 하자 엄마는 진실을 폭로하려면 이제까지 해온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데,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할 수 있겠느냐며 울면서도 딸의 의견을 물어요. 모녀는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열심히 살아왔던터라 그간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기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밤새 고민해봤는데, 우리 딸 잘 먹고 잘 자고 마음 편한 게 제일일 것 같다.




그녀는 내가 코디만 쓰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거라고, 엄마가 정말 미안하다고, 너를 너무 사랑한다고 딸을 꼭 끌어안으며 울어요. 생각해보면 예서 엄마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미움을 사는 인물이었지만, 자식에게만은 일관되게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에비해 선휘 엄마는 어떤가요? 건휘가 농구를 하다 한 아이의 목을 조르는 일이 있었어요. 그 아이는 곧바로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는데요. 소식을 들은 선휘 엄마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건휘가 선휘보다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선휘에게 가서 형이 한 걸 네가 한 짓이라고 말해줄 수 없겠느냐는 충격적인 말을 해요.

물론 한낱 이야기에 불과하기 때문에 실로 진지해질 필요가 없다는 건 저도 압니다만, 선휘 엄마의 공감 능력이 결여된 모습에 주목할 필요는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말을 들으면 선휘 그리고 건휘가 어떤 감정을 느낄까요? 선휘 뿐 아니라 건휘도 혼란스러웠을겁니다. 엄마가, 어른이, 아니 애도 장난으로라도 이런 말은 안 해요. 절대 하면 안 되는 말이잖아요.

그렇게 아이들의 정서를 파괴하면서까지 엄마가 지키고 싶었던 건 '1등'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1등'을 지키고 반드시 명문대에 진학을 시켜야만 했어요.

예서 엄마와 선휘 엄마의 공통점은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다는 것. '왜 저렇게 극성일까?' 하지만 둘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아이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할 때, 내 생각을 존중했느냐 아이의 생각을 존중했느냐. 거기서 갈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평상시 아이의 자존감, 자신감에 관심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것도요.

예서는 한바탕 소란을 겪고 다음해 수능을 준비하게 되는데요. 자신이 직접 짠 자기주도 학습 계획표를 엄마에게 보여주며 씨익 웃죠. 그에반해 선휘는 엄마가 잘못했다고 하는 뉘우침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잘못을 용서하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말을 남기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의 감정을 존중해야겠습니다. 성적은 다시 올리면 되는데, 애착손상은 다시 회복 시키기가 아주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내게 취미와 특기라는 게 있었나? 취미와 특기도 어쩌면 학교 수행평가를 잘 받기 위해 급조된 것이었다. "나에 관해서 아는 게 그렇게 없어? 생각 좀 하고 살아라, 짜식아!" 선생님들은 이렇게 다그쳤다. 나에 대해 생각하고 느낄 틈을 공부에 빼앗긴 아이들을 무뇌아 취급했다.


아침 일찍 학교 갔다가 학원까지 마치고 집에 오면 늦은 밤인데 취미 특기 만들 시간이 어딨어요. 공부가 취미라고 말해야 할 것 같은 환경을 만들어놓고 '너는 너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느니... 웃겨요.

저 학교 다닐 땐 방과 후 활동이 활발하지 않은 편이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어요. 다양한 흥밋거리를 접하고 배울 수 있게 학생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장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취미 특기 못 찾으면 어때 스트레스라도 풀고 가라는 의미에서라도요.

개들은 움직여야 했다. 이대로 살이 더 찐다면 아마 영원히 걷지 못할 수도 있다.


선휘와 은빈이 길을 걷다 목줄이 짧게 매인 개를 발견해요. 채소 과일을 파는 아저씨가 늘 곁에 묶어두는 개였죠. 그들은 개가 너무 불쌍했어요. 그래서 한 명이 망을 보는 사이 한 명이 줄을 끊어 개를 구해줍니다.

그리고 개의 목에 연고를 발라주어요. 그 개는 몹시 뚱뚱한 개였는데요. 운동을 전혀 하지 않아 배가 땅에 닿을 정도였어요. 개는 뛰어다녀야 하는데... 아저씨가 너무하단 생각에 그들이 벌인 꽤 과감한 일탈 행동이었죠.

하지만 곧 경찰에 붙잡혀요. 개 주인 아저씨에게 혼이 나고요. 물론 선휘의 엄마에게도 호되게 혼이 납니다. 선휘 엄마는 역시 개는 안중에도 없지만...

선휘는 그래도 설명했어요. 엄마가 이해할 수 있을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목이 짧게 줄에 매여 갑갑해보였다,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 하는 개가 너무 가여웠다, 개는 뛰어다녀야 한다... 그래도 여전히 엄마는 '어떻게 내 아들이 이런 일을!' 에만 포커스가 맞춰져 있네요.

개는 달려야 해요. 이대로 살이 더 찌면 영영 달리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리고 사람은 자유가 있어야 해요. 자유를 억압 받으면 세상으로 달려나가야 할 시기에 나가고 싶어도 발이 땅에 못박힌 것처럼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할 수도 있어요.

나쁜 엄마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늘 불안하고 근심 걱정을 달고 살지. 언제나 망상이 먼저 발동하고 결국 아이 뜻을 꺾고 지배자가 되려고 해. 어쩌면 엄마는 감정이 마비되어 있는지도 몰라. 그러니까 내 감정을 읽지 못 하지. 누가 엄마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당사자인 아이의 기분이 어떠한가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아이가 지친다는 신호를 보내올 때 누구보다 빨리 알아채주는 엄마가 되고 싶어요. 남들이 다 가지 않는 길이라 할지라도 아이가 가고 싶어하면 기꺼이 아이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누가 엄마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러게. 누가 우리를 이렇게 조급하게 만들었을까?

엄마는 단 한 번도 내 말에 귀 기울여 준 적이 없는 사람이다. 내가 행복하길 바라기보다는 나 때문에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이다.


육아가 참 어려워요. 우리는 인생을 먼저 살아봐서 어떤 길이 덜 힘들고 더 빠른 길인지 대충 알잖아요. 사랑하는 아이에게 지름길을 알려주고, 나름의 비법을 전수해주고 싶은건데... 아이는 꼭 제 몸으로 부딪혀 생채기를 낸 다음 경험치를 얻고 싶어하죠. 내 의도와는 달리 나를 오해할 수도 있고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얘... 내가 낳았어도 내 소유물은 아니잖아요. 실패할 권리, 상처받을 권리 있잖아요. 내겐 아이를 따뜻하게 안아줄 권한만이 있을 뿐이고. 내 생각이 맞음이 틀림없어도 가끔은 뒤로 물러나 줄줄도 알아야 하는 것 같아요. (그래, 방황해라! 그러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눈을 떴을 때 현기증을 느끼며 보는 세상, 거기서부터 시작이라고 오소희 작가님이 그랬다.) 내 욕심을 앞세워 가로막지 말아야지.

아이에게 분칠을 시켜 예쁘게 포장한 다음 무대 위에 올려놓고 내가 박수갈채를 받는 세상에서 가장 못난 엄마만은 절대 되지 않으리라고 새삼 또 다짐해봅니다.





선휘의 엄마가 변한 결정적인 계기는 선휘가 베란다 밑으로 떨어지려 할 때였어요. 하마터면 큰일날 뻔 했지요.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두 아들을 모두 잃을 뻔 했어요. 그 일이 있은 이후 엄마는 병원에 입원해 심리치료를 받아요. 선휘는 학교를 그만두고 사막으로 여행을 떠나고요.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아이가 꿈을 갖도록 환경을 조성해주고 꿈이 생겼다면 도와주고 지지해주는 게 부모의 역할인 것 같아요. 1등을 해야 한다고, 전교회장에 나가 스펙을 한 줄이라도 더 늘려야 한다고 잔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요.

이 책은 다소 과장된 면이 없지않아 있습니다. 모든 엄마들이 선휘 엄마같지는 않을거예요. (그녀는 정신증을 앓고있는 것처럼 보였...) 선휘 엄마보다는 그로인해 힘들어하는 쌍둥이에 초점을 맞춰 읽으시면 더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픽션이지만 안타까운 이야기였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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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군조> 6월 호에 발표한 이 작품은 그 해 <군조> 신인상과 제 75회 아쿠타가와상을 동시 수상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일본 문학의 양대산맥을 이루는 무라카미 류의 처녀작이라 많은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서 읽어 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현재의 명성과는 걸맞지 않게 이 작품이 처음 출간 되었을 때 일본에서는 이 책의 내용이 문학의 소재가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큰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더불어 인간의 내면을 그리지 않았다는 비판과 함께 고뇌와 회한도 담겨있지 않은 작품이라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고 하는데 청춘들의 끝모를 비애를 느낀 건 비단 나를 비롯한 소수 뿐이었다는 말이 되나.

1970년대 이 작품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엔 무려 19세 미만 구독 불가 판정을 받으며 읽어서는 안 되는 금서 취급을 당했다. 나는 사람들이 성과 약 묘사에만 눈을 번뜩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29년 전 내가 아무런 자각을 포함시키지 않고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상실감'이다. 1970년대 중반 일본은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뤄 내고 그 대신에 무엇인가를 잃었다. 이뤄낸 것, 그것은 일본의 고유의 문화를 위한 것은 아니었고..." 그들의 방탕한 생활에 손가락질 하고 고개 돌려버리는 사람들은 내가 확신하는데, 그들의 상실감 따위 제 알바 아니다.

독자는 청춘을 허비한 이들의 당시 일본 사회 시대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책이 출간되었을 당시 일본은 고도의 경제 성장과 동시에 무섭게 침투한 미국의 대중 문화로 인해 큰 쇼크를 먹었다. 미국 음악을 틀고 패션을 모방하면서 자신들을 '노란 인형'으로 취급하는 미군을 따라했다. 나라는 더욱 풍요로워졌지만 국민의 인간성을 돌볼 여력은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무라카미 류가 이 작품에서 방황하는 이들을 통해 무분별하게 미국 문화를 받아들이는 사회를 나타내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와는 다르게 너무 '현실적'이라는 평을 받는 작가 답지 않은가.

너무나 첨예한 그의 글이 일부는 쉽게 읽히지 않아 싫다고 말하지만 담아야만 하는 이야기를 거리낌없이 이야기로 풀어내는 작가는 흔치 않다고 본다. ('자극적인 소재를 사용한 책을 애장하고 있어요.'라고까진 말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책은 무려 작가가 23살에 발표한 것이다.
처절한 한 때를 보내고 있는 류의 또래를 누구보다 잘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 격변의 시기에 자신의 소리를 낸 것과 작품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음악에 대한 방대한 지식이 작품이 작가를 잘 만났구나, 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와 같은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이 만약 우리나라에서 영화화 된다면 거침없이 파국을 향해 치닫는 이들을 위한 청춘 영화가 되어 퇴폐미 신드롬 같은걸 불러올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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