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패니언' 이라는 직업은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 때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최초의 만국박람회였기에 접객 매너와 어학 능력이 뛰어난 고급 인력들이 별도의 교육을 받은 뒤 국제적인 행사, 사업 부양을 위한 파티에 투입 되었다고.

하지만 '컴패니언' 은 일본의 80년대 거품경제가 꺼지고 난 뒤 그들의 영예도 함께 꺼져서 이제는 가까스로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고 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 교코가 바로 컴패니언이다. 화려한 보석을 좋아하는 교코는 부잣집 남자와 결혼하기 위한 발판으로 이 직업을 이용하고 있는 듯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 작품이 심각한 사회경제적 부조리라는 묵중한 주제를 드러내고 있음에도 끝까지 너무 무거운 분위기로 흘러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교코가 한 몫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녀는 허영심을 대놓고 드러낸다.
 
특히 옆집으로 이사온 형사 시바타에게는 더더욱. 
 


 


그런데 '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 라니, 교코에게 무슨 계획이 있었다는 말인가? 추리소설에서 '계획' 은 영 께름칙한 어감인데, 게다가 형사가 바로 옆집에 산다잖아.
 
이거, 괜찮은걸까?
 
과연 누구에게, 무슨 계획이 있다는걸까.
 

(스포없음)

 
 
 

#1. 에리의 죽음

 
같은 컴패니언으로 활동하던 에리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그녀가 죽은 현장을 보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처럼 보이는데, 시바타 형사와 교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히가시노게이고의 소설 속 주인공 형사는 늘 탐정과도 같은 면모가 돋보인다. 이번에도 역시 범인이 설치해 놓은 덫에 쉽게 걸려들지 않았다.
 

#2. 에리와 연인사이였다고 주장하는 마루모토

 
마루모토, 그에게는 연인이 한 명 더 있었다. 요코. 그렇다면 내연관계인 요코의 존재를 눈치챈 에리가 그로인해 비관적인 자기파괴적 행동을 했다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마루모토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 하고 그를 죽이려다 도리어 본인이 죽어버린 것인가? 마루모토는 에리가 죽은 현장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이기도 하다. 매우 강력한 용의자 선상에 올라있는 중.
 

#3. 교코와 다카미

 
교코는 부자인데다 매너도 좋은 다카미를 좋아한다. 그래서 그와의 약속이라면 일을 빼고서라도 잡으려 한다. 그리고 어쩐일인지 다카미도 교코에게 관심이 있는 듯 하다. 그런데 이상한 건, 교코와 자꾸만 만나려고 하는 다카미가 만날 때마다 에리의 사건을 묻는다는 것이다. 곧 에리의 친한 친구도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는데, 그 사건도 자꾸만 캐묻는 게 이상하다. 다카미는 교코에게 관심이 있는걸까, 사건들에 관심이 있는걸까?
 

#4. 다카미의 전화에서 흘러나온 수상한 여자 목소리

 
다카미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교코가 받은 전화 안에서는 흐느끼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그 여자는 과연 누구였을까?
 

#5. 교코에게 추근덕거리는 겐조

 
겐조는 하나야 가의 셋째 아들이다. ('하나야 가' 는 에리가 죽은 그 날, 컴패니언들이 응대를 했던 전국 보석 체인점이다.) 망나니라고 불리울 정도로 행실이 지독히 튀는 사람으로 모두에게 알려져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교코에게 관심을 보인다. 그녀와 만나고 싶어하고, 그녀와 시간을 함께 하기 위해 교코가 가장 좋아하는 보석을 선물하기도 한다.  
 

#6. 이세

 
죽은 에리의 전연인이다. 이세 역시 죽었다. 에리보다 더 먼저. 이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으로 사건이 종결 되었었는데 아무래도 에리는 무언가 미심쩍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확실한 증거를 손에 넣었거나) 그 후 그녀는 도쿄로 올라온다. 
 
에리는 이세를 많이 사랑했던 것 같다.
 

 

 
 

죽기 전, 이세의 메시지가 큰 힌트가 되었다. 그로인해 에리의 죽음의 비밀도 풀리고, 가해자들의 신상도 마침내 드러나게 되었으니까. 
 
이세가 숨겨놓은 어쩌면 다잉메시지,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이 책이 주는 즐거움 중 하나다. 그의 배후에 누가 있었는지를 알아내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시바타와 교코의 노고, 죽은 유카리의 노력도 빼놓을 수 없겠다.
 

 
 


 

 

문이 굳게 잠긴 방에서 마치 혼자 죽음을 꾸민 것처럼 그려진 현장을 수상하다고 보는 것, 에리와 연인이라고 알려진 마루모토와의 관계 뒤 무언가 에리의 속셈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마침내 그 이유를 희미하게나마 파악하고 그녀의 고향인 나고야에 내려가 그녀의 전연인의 찜찜하게 마무리 된 사건을 재조명 하는 것 등.
 
이 밖에도 '조금 더 얘기해주지' 싶은 부분들이 많았는데 위에 열거한 것들은 그 중에서도 특히 더 아쉬웠던 부분이기에 구태여 남겨본다.
 
에리의 사건을 해결하는 데에는 사실 큰 힌트라기보다 사람의 상상과 직감에 크게 의존했기에 끝에 가서 결국 모두를 골머리 앓게하던 문제가 해결되었을 땐 박수를 치면서 '바로 그거였구나!' 가 아닌, '아... 이거였구나. 이런 방법도 있네' 싶어 다소 싱거운 기분이 드는 게 아쉬웠다. 
 
그리고 에리의 사건을 시작으로 덮어두었던 이세의 일, 다카미가 교코를 만날 때마다 에리의 사건을 물어보던 일들이 그다지 매끄럽다고 느끼지 않았다. (작가가 사건들이라는 퍼즐들을 미리 준비해 둔 뒤 어떻게든 맞춰지게 하려고 무리해서 갈고 다듬고 깎아낸 느낌) 
 
1988년에 발표된 초창기 작품이라니까 이 정도는 감안하고 넘어가주어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지만...
 
내게 이 책은 재미있고 단순한 추리소설이었다. 내 생각을 더하고 자시고 할 건덕지가 없이 재미있고 단순한 추리소설. 그래도 이제까지는 추리물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서 무조건 작가의 의도를 건져냈는데, 이처럼 '내용'과 '재미' 만 담겨있는 소설은 처음인 듯 싶다.   
 
그러니까 재미가 없었다는 뜻은 아닌데,
뭐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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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스에 료코가 주연을 맡아 큰 화제가 되었던 일본 영화 <비밀>. 1999년에 상영 되었어요. 오래됐죠.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은 왠만해선 다 재미있는지라 이번에도 의심 않고 읽기 시작했는데요.

너무 놀랐어요. 오래된 작품이니만큼 지금은 작가의 사상이 변해있으리라고... 믿고 싶어요.

책 내용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영화로 보면 좀 다를까 싶어 일부러 찾아봤어요. 그런데 내용 자체가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것이다보니 아무리 배우들이 열연을 해도 불쾌하고 찝찝한 마음은 들지 않을 수가 없더라고요.

읽고나면 반드시 의견이 한 쪽으로 치우쳐져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을 하실지 궁금하네요.




내용



엄마 나오코와 딸 모나미는 외가 제사를 지내기 위해 버스를 타고 이동해요. 하지만 그 버스는 산중에서 추락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됩니다. 나오코와 모나미는 같은 병원에 입원하게 돼요.

그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간 아빠 헤이스케는 의식이 몽롱한 나오코의 손을 꼭 잡고 들릴 듯 말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 귀기울입니다. 나오코는 모나미를 찾아요. 헤이스케는 모녀가 손을 잡을 수 있도록 침대를 붙여줍니다.

모나미의 손을 잡은 순간, 나오코는 이제 되었다는 듯 눈을 감는데요.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이번에는 모나미가 눈을 뜹니다.



"여보..."





딸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모녀가 손을 잡을 때 엄마의 영혼이 딸의 몸 속으로 들어간 걸까요? 모나미는 식물인간이 될 뻔 했지만 가까스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고, 곧 일상 생활도 가능하게 됩니다.

그리고 헤이스케에게 나오코만 아는, 모나미는 알 수 없는 부부만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자신이 나오코라고 설득을 시작해요.

나오코의 평소 습관, 요리 솜씨, 취미, 어른스러움은 흉내를 낸다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모나미의 몸을 빌린 나오코와의 시간이 시작되죠.


하지만 예상치 못한 일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그들은 부부지만 결코 관계를 맺을 수 없었습니다. 비록 눈 앞에 있는 사람이 나오코라고 해도 겉모습은 영락없는 딸의 모습이기 때문이었죠. 그런 그녀와 관계를 맺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꾹 참아요. (그로인해 짧게나마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바람을 시도하기도 했네요.)

나오코는 정신은 어른이어도 몸은 어린 아이여서 그런 욕구가 올라오지는 않았지만 남편을 위해 잠자리를 시도해보자는 제안을 몇 번이나 합니다. (심지어는 '입으로...' 라는 말이 나왔... 진짜 혈압!)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과학적으로 공부해보고 싶은 마음, 혹여나 딸이 돌아올 수도 있으니 멋진 인생을 살아놔야 한다는 마음, 열심히 공부하지 못 했던 지난 세월을 답습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공부에 매진해요. 열심히 했기에 결국 의대에 붙게 되고요.

하지만 합격 한 뒤 학교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일들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을 해두지 못했습니다. 연애를 할 수도 있고, 누군가 그녀를 좋아할 수도 있고, 동아리 활동을 하다보면 귀가가 늦어지기도 하는 것들 말이에요.

나오코를 위해 연애도 재혼도 포기한 헤이스케 입장에서는 서운함을 토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헤이스케를 나오코는 이해하지 못 했지만요.

그녀는 헤이스케 몰래 일명 썸을 타고 있는 소마 선배를 만나러 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오코 몰래 도청 기계를 설치해 대화 내용을 엿듣고 해당 장소에 미리 나가있던 헤이스케도 잘한 건 아니네요. 나오코는 집에 돌아와 기계를 발견하고 그에게 불같이 화를 냅니다.

그 이후 나오코는 시든 풀처럼 생활해요. 헤이스케가 결국 두손 두발 다 들게 되죠. 그녀에게 그녀만의 인생을 살라고 얘기합니다.






나오코와 모나미가 산중의 버스 추락 사고로 인해 영혼이 뒤바뀌었잖습니까? 그 버스에 타고 있던 피해자들의 유족들은 모임을 만들어 버스 회사에 높은 액수의 보상금을 요구하는데요. 그 과정에서 알게 되는 졸음 운전을 한 버스 기사의 가족사도 조명이 되고 있습니다.

졸음 운전을 한 버스 기사는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하지만 투잡을 하고 있었음에도 그의 아내는 늘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고백했죠. 알고보니 그는 자신의 친아들은 아니지만 호적상엔 아들로 올라가있는 아이를 도와주기 위해 버는 돈을 그 쪽으로 보내고 있던 것이었어요. 재혼한 아내가 데려온 딸은 그러면 그럴수록 가난한 생활을 벗어날 수 없는데 말입니다.







내용이 막바지로 치달을 즈음 모나미의 몸 안에선 다시 한 번 신기한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잠시였지만 나오코의 영혼은 어딘가로 달아나고 진짜 모나미가 돌아와요.

그리고 정신을 잃으면 또 잠시 뒤에 나오코가 돌아오는 그런 식이 몇 번 반복되었죠. 나오코는 모나미에게 그간 자신이 지내온 시간을 설명해 주기 위해 메모를 남겨놓기 시작해요.

헤이스케는 모나미도 만날 수 있고 나오코도 만날 수 있는 현실에 행복해 해요. 하지만 자신은 이제 곧 영영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암시의 메시지를 남기는 나오코에 곧 불안해지고 말죠.

그녀의 말대로 나오코는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시간이 줄어들어 갔습니다.

자, 이제 대망의 결말만 남았습니다. 이 결말은 (이제까지의 내용으로만 봐도 충분히 호불호가 갈릴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되지만...) 상당히 의외인 편입니다.

이제 모나미의 몸을 차지하게 되는 사람은 누구인지. 그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헤이스케는 어떤 길로 나아가게 될 지 이 부분들이 핵심인데요. 그러므로 이건 책에서 직접 확인해 보세요.

즐거움을 위해 찝찝하다거나 통쾌하다거나 하는 힌트도 남기지 않겠습니다.


함께 읽고 싶은 하이라이트
& 느낀점



헤이스케는 말똥말똥해진 눈으로 어둠을 응시하면서 나는 딸과 아내, 어느 쪽을 잃은 것일까, 라고 생각했다.



몹시 의아했던 점이 헤이스케는 아무리 모나미의 몸에 나오코가 들어왔다고 해도 그렇게 된 둘의 처지를 왜 깊이 슬퍼하지 않았느냐는 거예요.

내가 아는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렇게 사람의 감정을 몇 년이 훅 지나버린 듯 스쳐지나가버리는 작가가 아닌데... 당황스러웠어요.

"규칙 하나를 깨면 두 번째, 세 번째가 깨지는 건 순식간이야. 결국 엉망이 되겠지. 예전의 내 인생이 그런 식이었어. 결국 초등학교에서 전문대까지 14년이나 학교에 다녔으면서도 살아가기 위한 방도를 하나도 배우지 못했어. 나는 그런 짓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아. 그런 깊은 후회를 되풀이하는 건 절대로 싫어."



누구나 한 번쯤 하는 상상, 어린 시절로 돌아가 그 시간을 다시 살아보는 것. 나쁘지 않죠. 하지만 나오코는 후에 모나미가 돌아온다면 딸이 좋아할 만한 선택보다 자신의 생각을 우선합니다. 자신이 후회하는 시간을 모나미의 몸을 빌려 회복하고자 해요.

모나미의 몸을 빌리고 있는 주제에 남편에게 관계를 시도해 보자고 하는 망언이나 이런 이기적인 생각은 너무 무지하고 모자란 모성애 결여된 엄마 같아 보는 데 거북했어요.

10대 때만 보이는 것, 나이를 먹으면 차츰 보이지 않는 것이 분명 지금의 나오코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다.



십대를 다시 사는 나오코는 신이 났습니다. 만일 모나미였다면 어떤 학교를 가고 싶어 했을까, 어떤 수업을 좋아했을까, 어떤 첫사랑을 겪을 수 있었을까 고민을 하는 장면이 하나도 안 나와요.

작가가 남자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쪽으로 글을 쓰게 된 걸까 싶을 정도로 실망스러웠습니다.

저라면... 일단 사라진 모나미를 아주 오래 그리워 할 것 같은데. 거울을 볼 때마다 눈물을 쏟아낼 수도 있고요. 참으로 짧은 시간에 회복이 가능할 수 있었던 나오코가 비현실적인 가상 인물처럼 느껴졌고 그런 그녀에게 공감을 할 수 없어 힘들었습니다.

가지카와는 이쓰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가. 단순히 함께 살기로 한 여자가 데려온 아이였을 뿐인가. 과거에 내팽개친 친아들과 현재 돌봐주어야 할 의붓딸 사이에서 그는 어떻게 마음의 균형을 유지했을까.



졸음 운전을 한 버스 기사의 이름이 가지카와입니다. 그는 호적상에 친아들로 올라 있는 피가 섞이지 않은 아들과 죽기 전 날까지 함께 살았던 의붓딸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지 못했습니다. 의붓딸을 소중히 여겼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고 아들에게 생활비를 가져다주느라 딸이 생활고를 겪었다는 내용만 나오거든요.

개인적으로 이 책에는 이해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참 많이 나오는데 그 중 가지카와도 한 몫 합니다. 아들에게 돈을 가져다주려고 투잡을 뛰다가 졸음 운전을 하게 되서 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고, 그로인해 생활이 어려워짐과 동시에 정신이 피폐해진 그의 두 번째 아내 역시 죽고 말았으니까요.





초안이 된 단편의 제목은 <안녕, 아빠>였다고 하는데요. <비밀>도 썩 와닿는 느낌은 아니지만, 모나미보다 나오코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므로 차라리 바꾼 게 나은 것 같습니다.

결말이 이상하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는 결말까지 가기도 전에 이미 충격을 맛봐서 결말은 그저 그랬어요. 어떻게 딸의 몸에 들어가 있는 엄마라는 사람이 자신과 남편을 위해, 후에 딸이 돌아오면 대체 어떻게 설명을 하려고 잠자리를 요구할 수 있는지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아요.

그 충격이 너무 심해서 그 장면을 두둔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당혹감이 드네요.

나오코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 만약 모나미가 딸이 아니라 남자였다면, 아들이었다면, 그래도 똑같아요. 어떻게 자녀의 몸을 빌린 상태에서 배우자에게 관계를 제안합니까? 아, 토나올 것 같아. 더 심한 말 하고 싶은데 그냥 그만 할게요.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필요하신 분들 또 혼란스럽고 싶은 분들께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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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삭막해지고 냉정해지는 세상의 안과 밖에 끼어 희망의 지평을 노래한 작가 13명이 뭉쳤다.
시대의 회상과 현실의 부조리함을 동시에 이야기 하는 30대와 40대들의 대조적인 시선이 신기했으며 작가 소개란의 생년월일을 참고 하면서 작품을 비교하는 맛이 썩 흥미로웠다. 이토록 다양한 관점들은 음식을 가져오기가 용이한 뷔페에서 떠먹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단편소설 모음집이 가진 나른하고 편안한 색조가 하나 하나의 작품에 애착을 갖게 했다.

형용하기 어려운 그들의 공통적인 아름다움을 차치하고 지금 나의 머릿속에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는 작품은 서진의 '홈, 플러스'와 김곰치의 '졸업'이다.

무조건 악보대로 완주해야만 좋은 곡이라는 선생님의 호통이 피아노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앗아가버린 한창훈의 '그 아이'와, 코 앞에 다가온 지구 종말에도 솔직해지지 못하는 아니, 끝까지 겸손해지지 못하는 박민규의 '끝까지 이럴래?', 완전히 은둔형 외톨이의 시선에만 의지한 최진영의 '월드빌 401호' 또한 인상 깊었지만 소재의 참신함에서는 저 두 작품이 1,2위를 두고 다투는 용호상박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서진의 '홈,플러스'는 의뢰인의 청탁을 받아 사라진 이를 찾아주는 뱀파이어의 이야기다. 뱀파이어는 의뢰인의 피를 마셔야만 피에 함유 된 실종인을 향한 열정으로 가열차게 일을 할 수 있다. 사라진 아들을 찾아달라는 계모의 부탁을 받고 홈플러스에서 마주친 동규는, 그의 시야에 들어온 순간 계모의 열정으로 대책없이 덜미가 잡히고 만다. 영악한 동규는 자신의 잘못은 시인하지 않고 도망치느라 다리에 맞았던 후라이팬의 상처만 계모에게 이르면서 집으로 돌아간다. 아들의 치료비를 제한 수고비를 탁자에 내려 놓은 계모에게 그는 동감할 수 없었다. 어렸을 적부터 부모의 학대를 견디고 자란 터라 한낱 계모의 심정이 이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병원에 계신 나뭇가지 같은 아버지를 찾아간다.
그리곤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아버지를 제압한 후, 주삿바늘을 혈관에 꽂아 자신이 먹을 만큼의 피를 채혈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뱀파이어에게 죄책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의 피를 빨아들인다.
하지만 그 피는 아들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고, 만족스럽게 피를 빨던 뱀파이어는 이제껏 경험 해보지 못한 심장박동을 느끼며 당황스러워 한다.
사랑하는 아들이 남의 피를 빨아먹는 신세가 될 때까지 교류의 부재가 있었던 것은 안타까운 일이며 내게 먼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큰 그림으로 보아 이것은 분명 부정(父情)을 그려냈지만 마치 판타지 소설을 보는 듯한 즐거움 또한 함께 거머쥔 것이 눈에 띄는 작품이었다. 판타지 세계에서 현실로 하강하는 속도가 부담스럽지 않았던 것과 유하고 매끄러운 흐름이 참 좋았다.

김곰치의 '졸업'은 중학교 졸업을 앞둔 남학생, 여학생의 첫사랑 이야기다.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좋아하는 보경은 그 날도 어김없이 순철을 앞에 앉혀다 놓고 가상의 장면 장면을 각색해내기 시작한다. 그녀는 아마 성인이 된 후의 순철이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 길을 찾는 듯 헤매고 있는 한 여자에게 버스 노선과 배차 시간을 알려주고 나서 이상하게 자리를 뜰 수가 없더란다. 보경은 그 여자가 바로 영은이라 말했고 순철은 상상 속의 영은보다 눈 앞의 화가 난 듯 자신을 노려보는 보경을 보며 몹시 당황스러워 했다.

그는 영은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자신이 망설일 일은 없을 것이며 무엇보다 너의 이야기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까 화를 낼 일이 아니라고 차분히 보경을 타일렀다.

보경의 이토록 우울한 상상은 내일이 졸업식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식이 끝나면 보경은 도시로 이사를 가고 순철은 시골에 남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깜깜한 밤에 서로의 손을 잡고 눈을 감았다.

편안한 마음으로 지각한 순철은 내심 기대했던 상을 받지 못했다. 지각을 했으므로 교무실 문을 열기까지 많은 용기가 필요했는데 돌연 떠오른 보경의 얼굴은 그녀도 나처럼 교무실 밖을 서성이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졸업식이 끝나고 함께 사진도 찍기로 했기 때문에 학교를 뒤지며 그녀를 찾았는데 이미 조용해진 학교보다 더 고요한 공기가 숨을 턱 막히게 했다.

한달음에 내달린 그녀의 집은 무너진지 오래였다.

그 집 에서 담배를 피우는 순철은 어릴 적 보경의 상상대로 훌쩍 자라있었다. 그리고 집에 오기 전 버스 정류장에서 마주친 혜진이라는 이름의 '이거 참 실망인데.'라는 말을 떠올린 순간 그는 멈칫했다.

장면을 이루고 있는 배경의 따뜻함은 첫사랑 영화의 여파인가 작가의 의도인가 알 수 없게 아름다운 색채로 물들었다. 첫사랑 이야기는 아름답지만 언제나 이루어지지 않는 편이 더욱 아름다운 것 같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구성이 마음에 들었고 '버스 정류장에서 마주친 여자'를 추억과 그리움과 후회의 매개체로 만들어 낸 작가의 역량이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홈,플러스'와 '졸업'을 통해 내가 시대를 오가는 이야기에 마음이 끌리는구나 라고도.)

전통적 권위를 가진 한겨레문학상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작품을 선별 했다는 것은 미래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신인 작가들에게 마음을 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처럼 좋은 작가를 발굴해내고자 하는 문학상에 수준 높은 상상력을 보내보자. 훗날, 누군가 나의 글을 읽고 '수상 작가 단편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감탄하는 독후감을 쓸 지도 모르는 일이다.

문학상 수상 작품들은 짧은 글에 큰 힘으로 나에게 배움을 준다. 아마 그 글을 써내느라 흘린 땀방울이 뱀파이어가 마신 피처럼, 순철의 손목에 자그맣게 뛰고 있는 보경의 존재처럼 필경 우주를 흔드는 힘이 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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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와 전통을 자랑하는 제 144회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니시무라 겐타의 소설 <고역열차>.

AKB48의 멤버 마에다 아츠코가 열연한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의 감독은 아츠코와 함께 꿈도 희망도 없는 간타를 극장에 노출시켰다.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를 본 적이 있는데 극 중 주인공인 다마코 역시 만화책을 읽는 일 빼곤 딱히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버리는 한심한 취업준비생이다. 계속해서 이러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다마코와 간타 같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위기감을 동시에 일깨워주고 싶은 것 같다.

 

 

간타는 하루 하루 일용직 노동으로 돈을 벌어 먹고 사는 중졸 학력의 청소년이다. 학교를 싫어하거나 딱히 공부를 못하는 것도 아니었던 간타에게 아버지의 성범죄는 자신 뿐만이 아닌 가족 모두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일이었다. 무슨 일을 해도 '성범죄자 가족' 이라는 딱지가 발목을 잡을 것 같아 그 나이에 누려야 할 당연한 것들을 외면하는 사이, 간타는 어느 순간 '애초에 심성이 뒤틀린 아이' 가 되어버리고 만다.

분명히 간타는 잘못한 것이 없다. 세상을 향한 간타의 분노가 무서워 다가오지 못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지만 어린 아이에게 '성범죄자 아들'이라는 이야기나 수군거리고 다니는 어른들은 정말 나쁜 것 같다.
간타는 열아홉의 나이에 항만 노동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가는데 그 곳에서 동갑내기 친구를 만나게 된다.
대학에 진학하기 전 용돈을 벌러 나온 구사카베는 적당히 공부를 하고, 보통의 여자친구를 사귀는 평범한 남학생이다. 하루는 여자친구를 사귀고 싶은 간타가 꾀를 써 구사카베의 여자친구를 포함한 술자리를 만드는데 자신의 앞에서 진로 고민과 입바른 얘기를 주고 받는 두 사람에게 알 수 없는(간타만 모르는 열등감) 분노가 일어 모든 것을 망가뜨리고 싶어진다. 일부러 술을 잔뜩 마신 간타는 삿대질을 하며 성희롱은 고사하고 노력에 대한 모욕과 수치를 큰 소리로 떠벌린다.
소리만 크고 영양가 없는 고성에 질색했을 두 사람이 그 순간은 나도 안쓰러웠다.
두 사람에게는 그 날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간타는 너그러운 구사카베와도 서서히 멀어졌고, 그렇게 친구도, 연인도 없는 무미건조한 삶은 계속되었다.
이러다 노숙자로 쓸쓸히 죽어가는 건 아닐까 조용히 안타까워 하고 있었는데 나이든 간타는 자신의 노력을 있는대로 끌어모았으리라. 그의 뒷주머니에 꽂혀있던 후지사와 세이조의 사소설이 그를 구원해준 덕에 그는 글을 쓰는 작가가 된다.

 

하지만 유일하게 아침을 기다리며, 뼈를 깎는 허리 고통에도 하루하루를 소설로 버티게 해준 문학상 수상은 끝내 간타를 외면했고 음울한 색채가 짙게 깔린 후반부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절망적이었다. 그리고 작가는 간타의 고역열차는 앞으로도 계속된다는 듯 이야기의 막을 내려버렸다. 독자에게 상상의 여지를 주는 결말이 일본 드라마 <라이프>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이 책은 작가의 삶을 본 떠 만든 작품이다.

실제로 니시무라 겐타는 중졸에, 폭행 사건으로 두 차례 체포된 바가 있으며 부친이 성범죄로 감옥에 수감되었다. 부두 하역 노동이나 경비원, 주류판매점 배달원 등의 일을 하며 육체 노동으로 밥벌이를 하다 후지사와 세이조의 사소설에 마음이 움직여 뒤늦게 소설을 썼다고 한다.
이런 그가 일본 최고의 문학상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을 때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면 안 될 곳에 간다고 인터뷰 한 그가 빛이 되었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흙탕물에서도 꽃은 핀다. 고 정리해 두고 싶다.

세상은 밑바닥 인생을 살아온 간타의 성공 스토리를 기다리기 때문에 작가도 작품으로 더 힘을 냈으면 좋겠다.

 

 

니시무라 겐타의 이름은 <고역열차>로 내 가슴에 총알처럼 박혔다.
용기를 내 준 그에게 위로와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아래는 니시무라 겐타의 인터뷰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자신보다 못한 사람의 이야기를 읽고 위안을 얻기 바란다."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 누나와도 연락을 끊은 지 26년이 지났어요. 수상 소식을 접하고 연락이 올 법도 하지만, 아직까지도 연락이 없어서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소식조차 모릅니다."

"30여년 전 11세의 나이로 떠밀리듯 야반도주를 했던 바로 그 순간, 내 인생은 종치고 막을 내려버렸어요. 제가 아무리 노력한들 성범죄자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지울 수는 없어요. 이 때문에 일자리는 한정 되고, 제대로 된 여자라면 바로 제 곁을 떠나버렸죠.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의 가족은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로 죄도 없이 벌을 받아요."

"한 번은 구치소에서 제 작품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는 편지를 받은 적이 있어요. 막다른 골목에 부딪친 사람들이 제 소설을 읽고 용기를 냈으면 좋겠어요. 한편으로는 '뭐 이런 소설이 다 있어?'라고 생각한다 해도, 소설을 읽고 즐길 수 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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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다.
책 속에 등장하는 부모들의 상태를 보니 아이들이 그 지경인 것도 이해가 된다.

부모들은 느닷없는 연락을 받고 한날 한시에 학교로 소집했다.

굳은 표정의 담임과 교장선생님을 보며 어떤 이는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그렇다.
오늘 아침, 한 아이가 빨랫줄로 목을 매 교실에서 생을 달리했다.
그리고 죽은 그녀가 남겨놓은 몇 장의 유서가 부모들을 모이게 한 것이다.

 



자기 자식을 지키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거침없는 언행과 행동을 서슴지 않는 부모들은 굳이 아이들이 등장하지 않아도 가해자들의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게 해주었다.
각 반에 전담 선생님과 함께 배치된 아이들은 자살 소식을 듣고도 개의치 않아하며 아직도 집에 가면 안되냐는 둥, 피자를 먹고 싶다는 둥 소집해 모인 부모들의 축소판 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모인 부모들은 자식을 지키기 위해 증거를 인멸하고 무언의 약속을 강요했다. 아무리 유서를 많이 써놓고 죽어도 가해자들끼리 입을 맞춰버리면 그만이고 그게 불가능하다면 가해자들의 부모가 그것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먹어버리면 그만이라는 듯이 말이다.
수적으로 우세한 일은 옳은 것이 아니라도 따라가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피해자와 그 부모가 홀로 얼마나 분하고 원통할지 짐작이 어렵다.
교장 선생님은 학교 측에 문제가 없음을 스스로에게 억지로 확인시키고자 죽은 피해자 아이의 입장에 서보지 못했고, 가해자 부모들은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자기 자식을 변호하기 바빴다. (그 변호라는 것에는 현실 부정, 아이의 정서불안, 학교와 담임의 지도 부족, 삐뚤어진 피해자, 피해자 부모의 사람 됨됨이와 경제 수준, 누명 등이 담겨져 있다.) 이처럼 반성하지 않는 부모들은 아이들이 몸만 큰 모습으로 매우 희화적이었다.

책에서는 다행히 노부부 중 경찰 시절을 보낸 할아버지의 양심 고백으로 사태가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현실은 픽션보다 늘 지독하다는 것을 명심하자. (사실 그들도 진정한 반성을 한 것은 아니고 '같은 편'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흐름에 따라 잠시 입을 다물었다고 보는게 옳다.) 이런걸 보면 사람은 참 나쁘다 라는 생각이 든다. 철저하게 자기 자신밖에 모른다.

 



그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어떤 감상문을 내놓을까?
일본 드라마 <라이프>의 마나미처럼 집단 따돌림 주동자였음에도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가 있다면 반드시 도와주고 싶습니다.'라고 얘기할까?
자기 자식이 죽은 피해 학생의 도시락에 흙을 넣거나 강제로 악한 짓을 시켰어도 '부모는 자식의 마지막 보루'라는 말을 핑계로 끝까지 눈 가리고 아웅할까?

이런 책은 예방주사처럼 세상에 때묻기 전에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자기 자식은 눈에 흙이 들어가도 예뻐 보이겠지만 양심을 속여서는 안된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이 생각은 희미해지겠지만 작가는 더더욱 그러면 안된다.
이다지도 힘든 일을 지키는 부모들은 얼마나 대단한가. 정글같은 사회에서 양심은 그저 입바른 소리에 지나지 않고 옳은 것을 따르면 그것은 내 자식에게 화살이 되어 돌아오니까 말이다.

학교폭력이 비단 아이들의 문제라고 하지만 나는 그것이 말그대로 크나 큰 사회문제라고 생각한다.
피어나지 못한 영혼들이 끝없이 죽어나가도 확실한 대응방안을 마련하기 보다는, 세간의 이목을 끌면 그만인 사람들의 동정여론이 텔레비전을 보는 부모들에게 '피해자가 되느니 가해자가 되었으면' 하는 식의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다.
진심으로 학교폭력이 단절되는 사회 분위기가 이루어질 수는 없을까. 나의 양심은 그게 네 역할이라고 부추기고 있다.

 



이 책은 영화화 되어 스크린에서 관객과 만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출연자 중 한 명인 오달수 배우의 미투 사건 논란이 터지고 개봉은 무기한 연기 되었다. 오달수 배우 부분을 편집하고 새 배우를 물색해 재촬영 하려고 했으나 개봉을 연기하는 쪽으로 노선을 바꾸었다고.
(참고로 오달수 배우는 본격적인 개봉 준비에 돌입한 '요시찰'이라는 독립영화로 우리와 만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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