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생소할 수 있어도 이 표지는 익숙한 분들 많으실텐데요. 요즘 광고 많이 하잖아요, SNS에서.


저도 광고로 이 책을 처음 알았어요. 반은 속는 셈 치고 읽었는데 읽기를 잘했다고 생각해요. 심리스릴러라는 장르를 확실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거든요.

 

내용(스포주의)

 



그레이스는 평범한 30대 여성이에요. 밀리라고 하는 다운증후군을 가진 동생을 키우고 있고요. 왜 '키우고'있느냐 하면, 부모님이 밀리를 거두기 싫어해서 그레이스가 동생을 책임지고 있거든요.

어느 날, 공원이었어요. 그레이스와 밀리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잭이라는 남자를 만나게 돼요. 훗날 잭은 그 날 공원에서의 만남으로 그레이스에게 첫 눈에 반했다고 합니다.


40대 변호사에요. 남편에게 매맞는 아내들을 변호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잘생겼어요. 모두에게 친절하고, 유능한 직업을 가진 그에게 사람들은 호의적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남들에게 말 못할 비밀은 있는데요.

어릴 적, 잭의 아버지는 어머니를 정신적으로 괴롭혔어요. 지하실 같은 곳에 가두고 공포스러워 하는 어머니를 보고 즐거워 하곤 했죠. 그런 어머니를 보며 잭은 처음엔 아버지에게 경멸을 느꼈지만, 시간이 갈수록 감정이 변모하여 그를 존경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지하실에서 나오려 애를 쓸 때, 그걸 막으려고 어머니를 때리기 시작해요. 그러다 어머니가 죽고 마는데요. 잭은 그 죄를 아버지에게 뒤집어 씌워요. 그렇게 아버지는 감옥에 갑니다.

경찰이 왔을 때 소년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였고 자신은 어머니를 보호하려 했다고 말했어. 그래서 아버지는 감옥에 갔고 소년은 기뻤지. 소년이 나이가 들자 그 역시 아버지가 그랬듯 자기만의 사람을 갈망하기 시작했어. 원할 때마다 얼마든지 공포를 주입할 수 있는 사람, 계속 숨겨둘 수 있는 사람,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사람.


이건 그레이스와 잭이 결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잭이 해준 이야기에요. 잭은 이 이야기 속의 소년을 자기라고 칭하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이 얘기를 하기 바로 직전에 잭은 그레이스를 방에 가두고, 앞으로 밀리도 가두겠다고, 내게 공포라는 맛을 보게 해 줄 사람을 찾아 헤매왔다고 고백했거든요. 그리고 절망적이게도 그레이스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 밀리를 목적으로 너는 이용할 뿐이라는 말도 해요.)

잭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그러했듯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존재로 그레이스를 선택한거예요. 밀리를 약점으로 삼아 이용할 수 있겠다, 싶어서요.

그레이스


그레이스는 그와 결혼을 취소하려 애쓰는데요. 당연히 해주지 않죠. 그래서 그에게서 도망가려 해요. 하지만 그도 쉽지 않습니다. 그레이스가 난동을 부려 사람들이 도와주려고 다가오면 잭은 그레이스를 조울증이 있는 환자로 만들어서 그녀의 말에는 신빙성이 없다고 느끼게 해요.

그래도 그레이스는 도망갈 기회를 계속해서 만들어요. 하지만 그 시도는 번번히 좌절되고 맙니다.

잭은 상대가 공포를 느끼면 좋아하는 사람이었어요. 그 공포의 냄새를 맡기 위해 일부러 그레이스가 도망갈 수 있는 구실을 마련해두기도 합니다. 물론, 그가 마련해둔 장치이기 때문에 성공할리는 만무하지만요. 탈출에 성공하는 줄 알고 흥분했던 그레이스가 결국은 좌절과 무력감을 느끼는 걸 보고 잭은 기뻐해요. 그리고 네 생각을 내가 전부 꿰뚫고 있다는 얘기를 하죠.

"어디 있어, 그레이스?" 노래 부르는 듯한 나지막한 잭의 목소리가 중앙 홀 쪽에서 들려 더욱 공포스러웠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잭이 킁킁 냄새를 맡는 소리가 들렸다. "음, 공포의 냄새, 너무 좋아." 숨을 하아 내쉬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의 발소리가 자박자박 점점 가까워 와 나는 더욱 몸을 움츠렸다. 발소리가 멈췄다. 온 신경을 귀에 집중시키고 있는데, 뺨에서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잭이 속삭였다. "어흥!" 나는 안도감이 뒤섞인 울음을 왈칵 터뜨렸고 잭은 미친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작가가 말미에 '그레이스를 보며 독자는 답답함을 느낄 지도 모른다'고 얘기했는데, 저는 전혀요? 많은 사람이 그레이스처럼 행동했을 것이고요. 그 중 대다수는 중도에 포기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어요.

 



밀리


지켜야 할 존재가 있었으니까요. 부모님마저 밀리를 거두기 꺼려하는데, 그레이스는 온 마음으로 밀리를 끌어안아요.

밀리는 다운증후군이 있어 시설에서 지내고 있어요. 밀리는 결혼식 날 그레이스의 들러리를 서기를 원했어요. 하지만 잭이 계단에서 몰래 밀어버리는 바람에 할 수 없었죠. 그 때부터 밀리는 잭을 싫어해요. 하지만 밀리가 잭을 싫어하면 잭이 밀리를 위해 마련한 (끔찍한)방으로 하루라도 빨리 데려올 가능성이 있어, 그레이스는 밀리에게 잭을 좋아해야 한다고 강요해요.

밀리는 똑똑한 아이에요. 그래서 그레이스의 의도를 눈치채고 잭의 앞에서 잭을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대신 조지쿠니(조지클루니)는 싫다는 말을 계속 하는데, 조지쿠니가 바로 잭이에요.

그레이스가 잭 때문에 집에 갇혀 밖에 나올 수 없었기 때문에 밀리는 시설에서 외로웠어요. 잭이 전한 찾아오지 못하는 이유라는 것들이 '친구를 만나야 해서', '피곤해서'여서 더 그러했죠.

복수의 계기


그레이스가 탈출을 시도할 때마다 잭은 그녀를 잡고 벌을 줘요. 지하실에 가두거나, 밥을 주지 않거나 하는 식으로. 그래도 그레이스는 참을 수 있었어요. 계속 탈출을 시도해야 했죠. 왜냐하면 잭이 밀리를 '이 집'에 데리고 온다고 했거든요. '이 집'이라는 건, 잭이 마련한, 남들이 보기에는 으리으리한 집인데요. 그레이스에게 벌을 준답시고 가두는 지하실이라는 곳은 끔찍하기 그지없어요.

바닥부터 천장이 모조리 빨강으로 칠해진 곳이고요. 어느 날 잭이 그레이스에게 초상화를 그리라는 요구를 했는데, 그녀가 받은 사진에는 모두 매맞는 여자들의 모습이 담겨있었어요. 자신에게 의뢰를 하러 온 피해자들의 사진들이었죠. 그레이스는 구역질을 참으며 초상화를 그려요.

그리고 그 초상화를 그 빨간 방에 전시합니다. 잭은 밀리를 집에 데리고 오면 이 방에 가두겠다고 얘기해요. 그레이스는 그것만은 막아야 했어요. 왜냐하면 자신이 그 안에 가두어져 봤거든요.

복수


복수를 해야겠다고 그레이스는 다짐해요. 탈출이 끝이 아니라 이 남자를 죽여야겠다고요.

밀리가 지내는 시설에 갔는데, 밀리가 요즘 밤에 잠을 잘 못 잔다네요. 그래서 수면제를 먹고 있대요. 그런데 알고보니 밀리는 약을 먹지 않고 그 약을 모아두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레이스를 만나 '조지쿠니 나쁜 남자' 라는 말을 반복하며 이 약을 조지쿠니에게 먹이라고 해요. 그레이스는 그래서는 안 된다며 약을 버리는 척 했는데, 실은 옷소매에 약을 숨겨왔어요. 완벽한 계획을 위해 밀리마저 잠시 속입니다.

잭이 변호사잖아요. 지금 중요한 사건을 하나 맡고 있는데 이제까지 패소를 해본 적 없는 잭이 재판에서 지게 될 위기에 놓여요. 이 시점에 그레이스는 틈을 파고듭니다. 매일 위스키를 나눠 마시자고 해요.

그리고 잭이 패소하고 돌아온 날, 그레이스는 계획을 행동으로 옮깁니다.

위스키에 잘게 부순 약을 타 넣어요. 그리고 대화 도중 갑자기 잭의 얼굴에 위스키를 끼얹어요. 비틀거리는 사이 그레이스는 있는 힘껏 아래로 도망가고요. 하지만 어느새 쫓아온 잭이 그레이스를 지하실에 가두려 해요. 그레이스는 잭에게 매달려요. 매달린 채 바닥까지 내려온 그레이스는 그의 무릎을 꼭 껴안고 힘을 줘 그의 다리를 넘어뜨립니다. 넘어진 그를 지하실에 넣고 그레이스는 결국 문까지 닫는데 성공해요.

지하실은 안에서 열 수 없어요.

통쾌함


독자들에게 통쾌함을 주는 부분은 잭의 죽음이 다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그레이스는 잭이 그랬던것처럼, 모두에게 피해자인 척을 하며 잭이 저와 통화가 안 된다고 호소해요. 그레이스는 홀로 태국에 와 있는데요. 잭이 서류 작업을 마치고 곧 따라온다고 했는데 연락이 안 된다며, 누구라도 좋으니 좀 도와달라고 그렇게 '남편 잃은 아내'이미지를 써요.

사람들은 그녀를 동정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할 말과 행동을 미리 예측하며 매 순간 순간 치밀하게 연기해요.

영국에 있는 잭이 홀로 목숨을 끊은 것 같다고 누군가 그녀에게 소식을 전해줍니다. 그레이스는 무너지는 척 오열해요. 약물과다복용으로 죽었다고 그러더군요.

연대할 누군가


에스터라는 인물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레이스와 잭을 의뭉스럽게 바라보는 사람이에요. 에스터가 실의에 빠진 그레이스에게 커피 한 잔 하자고 합니다. 그리고 그레이스에게 들려줘요. 잭은 약물과다복용이 아니라 탈수에 의해 죽었다고.

그걸 어떻게 알아? 남편이 얘기해줬대요. 에스터의 남편은 잭과 같은 변호사거든요. 그리고 잭이 죽어있는 당시를 목격한 사람이기도 하고요.

에스터가 갑자기 물어요. 잭의 마지막 모습이 기억나느냐고. 잭이 우리에게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해주었던 것, 손을 흔들어 주었던 것이 기억나느냐고. 그레이스는 에스터를 바라봅니다.

잭이 딱 한 번 사람들 앞에서 말실수를 한 적이 있어요. 그레이스를 감시하는데 정신이 팔린 나머지 말실수를 했던거죠. 그 때 잭은 밀리를 그들의 집 중 '빨간 방'으로 데려올 것이라는 말을 했는데, 에스터는 이 실수를 잊지 않고 있었어요.

그레이스가 목숨처럼 사랑하는 밀리를 끔찍한 그 방에 데리고 온다는 데 동의했을리가 없어요. 에스터는 내내 의문을 가져왔던 것 같습니다. 에스터는 그간 잭이 그레이스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은 것, 그레이스가 핸드폰도 이메일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등을 이유로 들어 퍼즐을 맞춰봤을거예요. 그리고 이 완벽해보이는 가족에 무언가 문제가 있음을 어느 순간 눈치챘겠지요.





물리적인 폭력을 당할 경우에는 흔적이 남아요. 하지만 정신적인 폭력을 당할 경우에는 피해자의 말과 그간의 정황 밖에는 달리 증거가 없습니다. 신호를 보내면 눈치를 채주는 것도 손을 잡아주는 하나의 방법인 것 같아요. 그리고 피해자는 그레이스처럼 지지 않으려는 마음, 독기를 유지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할 것 같아요. 쉽지 않겠지만요.

이 책의 원제인 'Behind Closed Doors'란 '은밀히, 비공개로'라는 뜻으로 '밀실 회담을 나누다'등에 주로 쓰이는 표현이다. 공식적인 일들도 밀실에서 부당하고 야만적인 방식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아직 너무나 많은 이시대에, 더구나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현관문을 닫은 후 개인적인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어떨까? 공식적으로는 누구에게나 좋아 보이는 행동을 하고서,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는 자기만의 사악한 욕심을 채우기 위한 밀담을 나누는 이들처럼 모든 것에 철저히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며 살아가는 인간은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요즘은 가스라이팅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더라고요. 아내를, 남편을, 아이들을 괴롭히는 교묘한 덫. 다양한 형태로 이미 많은 가정에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동물적 폭력은 문명의 발달에 따라 분명 줄어들지만, 심리적 폭력은 더욱 교묘하고 기이한 형태로 현대 사회에서 개인 삶의 틈새를 파고든다. 이 소설의 악당 잭 역시 아내에게 따귀 한 번 때리지 않고 자신의 가학적 욕망을 관철한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까 싶지만, 멀쩡한 사람을 정신병자로 몰아가고 노예로 부리고 감금하는 일 정도는 요즘도 너무나 흔하게 일어난다. 어수룩한 사람들만 당하는 일도 아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그레이스도 충분히 지성인이지만, 남보다 조금 부드럽고 감성적인 성격에 무척 사랑스러운 동생이 있다는 것이 결정적이 약점이 되어버린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상대의 약점을 건드리는 일에 주저가 없는 사람들. 저는 가정에서의 문제 뿐 아니라 보이스피싱과 염전노예도 떠올랐어요. 심리적 폭력이 갈수록 교묘하고 기이한 형태로 개인 삶의 틈새로 파고든다는 말이 소름끼쳐요.





작가의 다른 책을 읽어볼 생각이에요. 그 유명한 '테라피스트'를 읽어보려고 하는데요. 심리스릴러라는 장르에 흥미가 생겨서요. 후기가 궁금하다면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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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작가의 조금은 흔한 제목. 큰 기대 않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읽으면서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을 몇 번이나 참아야 했어요. 마지막에 가서는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담아야 했고요. 오랜만에 참 좋은 소설을 만났습니다. 소설책을 그리 많이 읽는데 누군가 소설 추천을 해달라고 하면 적당한 게 떠오르지 않아 난감할 때가 종종 있었어요. 이젠 주저 않고 이 책을 추천할 것입니다.

내용(스포주의)

 



아사토는 사토코 부부의 소중한 아이에요. 6살이고, 평범하게 유치원에 다녀요. 사토코 부부는 아사토를 무척 사랑하고 아끼며 보호해줘요.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어요. 유치원에서 전화가 온 거예요. 받아보니 아사토가 친한 친구 한 명을 정글짐 위에서 밀어버렸대요. 그래서 그 친구는 다리에 깁스를 하게 되는데요. 선생님의 말을 들어보니 등떠밀림을 당한 아이의 입에서 아사토의 이름이 나왔을 뿐 아사토는 친구를 밀지 않았다네요. 몇 번을 물어봐도 아사토는 밀지 않았대요.

그래서 사토코는 아사토를 믿어요. 드세고 교양이 부족해 보이는 친구의 엄마가 자연스럽게 치료비를 요구할 때에도 사토코는 아사토의 말을 믿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아요. 그로인해 그 친구의 엄마에게, 그 친구의 엄마가 소문을 내고 다니는 아사토 친구 엄마들에게도 곱지 못한 시선을 받게 되는데요. 그래도 사토코는 끝까지 아사토를 믿어요. 아사토가 "그냥 내가 밀었다고 할까?" 라고 말을 할 때에도요.

다행히 친구가 실토를 했어요. 정글짐 위에서 자신의 엄마가 하지 말라던 뛰기를 해서 혼날 것이 두려워 사토코에게 밀림을 당해 떨어진 것이라고 거짓말 했다고. 친구 엄마는 울며 사과를 해요.

사토코도 사실 마음 속으로는 실은 아사토가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하고, 그냥 사과하고 끝낼까 생각도 했어요. 하지만 그럼 아사토가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이럴 때 아이를 믿어줄 사람은 다름아닌 부모라는 생각에 사토코는 끝까지 아사토를 믿어주었어요.

이건 하나의 일화예요. 이렇게 아이를 믿고, 아끼는 엄마의 마음을 보여주는 일화. 사실 사토코네 집엔 비밀이 하나 있는데요.





사토코 부부는 불임 치료를 오래 받았어요. 하지만 결국 부부는 아기를 가질 수 없다는 걸 깨달아요. 몹시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장면 장면엔 저도 심경이 복잡해졌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티비에서 특별 양자 결연 프로그램을 보게 돼요.

양자 결연



아기를 낳았는데 아기를 키울 수 없는 환경의 부모가, 아기를 낳을 수 없지만 아기를 기를 수 있는 환경을 갖춘 의지가 있는 부모에게 입양을 보냅니다.

하루는 양자 결연 설명회를 연다고 하여 아기를 원하는 예비 부모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는데요. 이런 저런 설명을 듣다가 문득 한 남자가 손을 들고 말해요. 입양을 할 수 있는 부모의 나이 얘기가 나왔거든요. 입양을 할 수 있는 부모의 나이는 40살이 최대라는 말에 손을 든 거예요.

마른 남자의 울대뼈가 떨렸다. "나이 많은 부모의 육아는" 하고 가는 목소리로 계속했다.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십 대라서 좋은 면도 많지 않겠습니까? 경제적인 면이나 경험이 풍부하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그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저희는 지금껏 수많은 곳에서 연령 제한을 당했습니다." 조용한 실내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구체적인 말을 하지 않아도 설명회에 참석한 많은 부부들이 자신이 더듬어 온 길의 어떤 장면을 떠올리고 있다는 것이 전해졌다.


이 남자는 마흔 몇 살이었어요. 위의 말처럼 나이가 많으면 경제적으로 그리고 풍부한 경험을 통해 아이에게 인생 선배로서 들려줄 이야기가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육아에서 체력을 빼놓고 얘기하기는 어려워요. 나이가 들면 젊었을 때의 혈기를 잃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장점이 있는 반면 단점도 존재하는지라 나이 많은 부모의 입양에 대해서는 남자의 말에도 공감이 갔고 동시에...

"특별 양자 결연은 부모를 위한 제도가 아닙니다. 아이를 원하는 부모가 아이를 찾기 위함이 아니라, 아이가 부모를 찾기 위한 겁니다. 모든 활동은 아이의 복지를 위해 그 아이에게 필요한 환경을 제공하기 위한 겁니다." 그녀는 단언했다. "최우선으로 삼는 것은 아이의 생명을 지키는 겁니다. 태어난 아이의 심신이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는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말에도 공감이 갔어요. 사실 입양에 있어 일 순위는 아이여야 함이 맞는 것 같아요. 하지만 사토코 부부도 그렇고 남자의 말에서도 그간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알 수 있어서 마음이 아팠어요.

사토코 부부는 이 양자 결연 제도를 통해 자식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생모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원칙상 그러면 안되지만 생모가 원하고, 또 양부모가 동의하면 딱 한 번 만나 서로 인사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어요. 사토코 부부는 아이의 엄마를 만나러 갑니다.

그들은 깜짝 놀라요. 이십대 초반도 고등학생도 아닌 중학생이 그 자리에 부모님과 함께 앉아있었거든요. 그 엄마는 엄마가 될 사람의 손을 잡고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이 아이를 잘 부탁합니다." 연신 인사를 했어요.

중학생 히카리는


엄격하고 청결한 집안 분위기가 싫어요. 부모님은 착하고 공부 잘하는 딸의 이미지를 만들어 놓고 그녀를 그 안에 집어 넣으려 애를 써요. 하지만 히카리는 들어가기를 거부하죠. 부모님은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화를 내요. 그 무렵 히카리는 첫 남자친구를 사귀게 되는데요. 깨끗하고 엄격한 부모에게 복수라도 하듯 히카리는 피임도 하지 않고 관계를 해버려요.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남자친구를 좋아하기도 했고 뭐, 그 때까지만해도 남자친구도 히카리를 좋아했어요.

어느 날, 남자친구와 레스토랑에 갔는데 음식이 맛없게 느껴지고 화장실에 갔더니 메스꺼운 느낌이 드는거예요. 히카리는 교제 중 임신이 되었어요. 이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수술을 할 수 있는 기간을 지나 원하든 원치 않든 아기를 낳을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요.

엄마는 불같이 화를 냈어요. 그리고 아빠와 엄마, 언니, 히카리가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히카리의 일을 히카리에게는 묻지 않고 다같이 앞으로에 대해 상의 해요. 이야기는 입양으로 흘러갑니다. 히카리는 싫다고 해요. 하지만 뭐가 싫은건지, 싫다면 앞으로 어떻게 할건지에 대한 계획과 확신은 당연히 없어요.

배가 불러오기 때문에 학교에는 적당히 둘러대고, 입양 센터에서 지원하는 기숙사에 숙식하며 출산을 기다립니다.

그 만화는 일례로, 찾아보니 비슷한 패턴의 이야기가 여기저기 많이 있었다. 이야기마다 '피임할 것'을 권하고, 그렇게 하지 않은 경우에는 남자친구가 도망가서 중절하게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히카리는 그 이야기들을 현실감 없이 읽었다. 자신은 이렇게 되지 않을 건데, 과하게 협박하는 내용은 어른들이 머리로 생각한 스토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드시 '중절'에 이르는 스토리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바로 임신을 알아차리고 주변 어른들을 끌어들여 마음이 흔들린다. 거기에는 히카리가 필요로 하는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임신해도 바로 배가 불러오지 않는다는 것. 첫 생리가 오기도 전에 임신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 중절이 불가능한 여섯 달이 지나도 본인이 알아차리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 등은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히카리는 어른들을 비웃었죠. 청결하고 성실하게 사는 어른들을. 하지만 히카리만의 잘못이라기엔 그는 너무 어리고 어리숙했어요. 다들 그런 시기가 있었잖아요. 저는 성교육도 교육이기 때문에 놓치고 지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부모나 교사가 가르쳐 줘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아이는 친구나 인터넷에서 잘못된 정보를 얻을 수도 있어요. 잘못된 행위에 대한 댓가가 큰 일이기 때문에 정확한 정보를 눈높이에 맞춰 반드시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부모의 도움을 받기 어려운 아이들은 교육기관이나 책 등에서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친절한 안내가 더 많아져야 할 것 같아요.

출산 후


히카리의 남자친구는 중간에서 부모님이 뭐라고 말씀을 하셨는진 몰라도 히카리가 아기를 낳지 않았다고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제 그만 그녀와 이별하고 싶어해요. 히카리는 슬펐어요. 그에게는 이번 일이 하나의 해프닝 혹은 추억으로 남겠지만 그녀에게는 뼈저리게 아픈 일상이었거든요. 그가 훗날 무용담처럼 얘기할만한 일이, 그녀에게는 아니었거든요. 히카리는 배신감과 크나큰 허탈함을 안고 돌아서요.

시간이 흘러 히카리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갑니다. 하지만 이 역시 엄마의 성에 차지 않았어요. 더 좋은 학교에 갔으면, 하고 바랐거든요. 히카리는 이제 가출을 결심해요.

가출


허나 갈 데가 있나요? 선택지는 단 하나. 출산을 하기까지 머물렀던 기숙사에 가요. 그리고 여기에서 일을 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담당자는 다행히 좋은 사람이어서 부모님께 연락을 드린 후 허락을 받으면 일을 하게 해준다고 해요. 그리고 예상 외로 히카리는 허락을 받아요. 히카리 말로 부모님은 이제 자신을 포기한 것 같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곧 양자 결연 단체가 사라지기 때문에 기숙사도 문을 닫아야 할 처지에 놓이게 돼요. 히카리는 담당자에게 소개 받은 다른 일을 하러 또 여정을 떠나게 됩니다.

 

신문 배급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외롭고 혹독한 일. 하지만 히카리는 성실하게 일해요. 그런데 이 곳은 아무나 일하러 왔다가 인사도 하지 않고 갑자기 무단결근 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곳이었어요. 한 여자가 일을 하러 오는데요. 행색이 너저분하고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져있는 듯 보이는 여자였다고 묘사할게요. 그 여자는 처음엔 히카리와 잘 지냈어요. 그래서 히카리가 마음을 놓고 그간 있었던 일을 말해버리고 마는데, 그 후 여자는 히카리에게 돈을 빌리고 갚다가 안 갚다가를 반복해요. 그리고 어느 날, 누군가에게 맞은 듯한 모습으로 히카리에게 보증을 좀 서줄 수 있겠느냐고 하는데요. 히카리는 거절해요.

"도장도 내 것이 아니에요. 이런 건 어디서든 살 수 있잖아요. 필적도 감정하면.", "히카리 짱. 그런데 말이다, 이건 네 이름이야." "그래도" 그때. 양복 차림의 나이 많은 남자가 슬그머니 오더니 테이블을 걷어찼다. 쾅 하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히카리의 눈앞에서 테이블이 솟구쳐 올랐다. 남자는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깨가 흠칫거려서 입도 뻥긋할 수가 없었다. 남자가 조용히 히카리를 내려다보았다. 눈빛이 싸늘했다. "돈 갚을 만한 일자리를 찾아줄 테니 언제든지 연락해." 히카리는 떨고 있었다. 이건 분명히 이상하다,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데도 마치 가위눌린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수금이나 구독 권유로 남자들의 노골적인 시선을 받아 왔다. 그것은 상당히 여유로운 축에 속하며 상냥한 시선이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여자로서의 자신에게도 관심이 없고 단순한 폭력과 무자비함밖에 없는 이런 눈빛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여자로서 관심이 없을 텐데도 그 싸늘한 눈빛은 마치 히카리를 상품처럼 보고 있었다. 남자가 말한 '돈 갚을 만한 일자리'에 짚이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


하지만 히카리가 서명했다는 종이를 가지고 웬 남자가 등장하죠. 여자는 이미 도망간 후고요. 히카리는 이후 남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요. 몇 번이나 아니라고 했지만, 남자는 믿어주지 않았어요.

그 때 히카리에게 보호자가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함께 법의 힘을 빌리려고 도모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히카리는 보호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고, 누구보다 나약한 존재로 비춰졌기 때문에 남자는 어쩔거냔식으로 히카리를 궁지로 몰아넣어요. 일자리를 바꿔 도망쳐 왔는데도 쫓아와서 돈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히카리는 질려버려요. 그래서 가게의 돈을 훔쳐 남자에게 갖다줘요. 보증을 서지도 않았고, 자신이 빌리지도 않은 돈을.

두려웠다. 궁지에 몰렸고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 공포와 끝까지 내몰린 심정을 부디 다른 사람도 알 수 있도록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싶지만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남자들과 히카리 사이에는 조리 있게 말로 따지는 상식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
그런데 어떻게 했어야 옳았다는 걸까. 하마노는 자기한테 왜 상담하지 않았느냐고 했다. 그 말대로 상담하지 않은 쪽은 히카리다. 하지만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왜냐하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갚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쳐 주지 않았다.


히카리에게 보호자가 있었더라면. 가족, 친구, 친척, 연인... 그 중 하나라도 곁을 지켜주었더라면. 히카리는 남의 돈을 갖다 줬기 때문에 이제 그 돈을 갚아야 해요. 그런데 어디서, 어떻게요?

 

 

 

6년만의 재회


히카리는 사토코 부부를 찾아가요. 기숙사에서 나올 때 우연히 자신의 서류를 봤거든요. 양부모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전화번호까지 모조리 외워두었어요. 그래서 찾아가기 전, 몇 번씩 전화를 걸기도 했어요. 물론 이 쪽에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요. 한 번, 자신이 낳은 그 아이가 전화를 받았을 때 히카리는 멈칫해요. 히카리는 사토코 부부의 아파트 앞에서 이렇게 좋은 집에서, 내가 낳은 아이를 데리고,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도 되는거냐고. 뻔뻔한 사람들 아닌가 하는 생각에 분노해요. 당시 히카리는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아이를 돌려주세요.

 



제가 낳은 아이니까 돌려달라고. 돌려줄 수 없다면 돈이라도 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얼굴을 보고 이야기 할 날짜를 잡아요. 히카리는 사토코 부부의 집으로 오게 됩니다. 그런데 히카리는 생각지도 못한 일을 겪게 돼요.

사토코 부부가 화가 났어요. 당연하죠. 그런데 화가 난 이유는 우리 아들의 엄마, 내 아들을 낳아준 우리의 엄마를 그녀가 모독하고 있음에 화가 난 거였어요. 아들의 생모는 아이를 우리에게 건넬 때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잘 부탁한다고 거듭 부탁을 했었는데, 이렇게 아이와 돈을 엮어 얘기 할 사람이 아니라고요. 사토코 부부는 몹시 불쾌해 했어요.

"아이 엄마가 자금의 아사토를 만나고 싶어 하거나 아사토를 도로 데려가고 싶어 하는 거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돈 이야기가 나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요. 아이의... 우리의 엄마는 그런 말을 꺼낼 사람이 아니에요."

 

 


당신은 도대체 누구냐는 대화를 하고 있던 중, 아사토가 유치원에서 돌아옵니다.

아사토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히카리는 무너지고 말아요. 그리고 사토코 부부 앞에 머리를 처박고 죄송하다고. 저는 아이의 생모가 아니라고 사과해요.

히카리는 임신 중에 아사토와 바다를 보았어요. 꼬맹아, 하고 불렀고요. 보호하듯 손을 얹고 함께 걸었어요. "이제 얼마 안 남았어. 힘내자"라고 말했어요. 너와 바다를 본 이 순간을 오래 오래 기억하겠다고. 히카리는 다짐 했었어요. 히카리에게 아사토는 그런 존재에요. 입양을 보냈지만 소중한 존재. 행복을 깨뜨리고 싶지 않은 존재.

그리고 히카리는 사토코 부부와의 대화를 통해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했지만 그 집에서는 버림받지 않고 보살핌 받는 존재로 함께 살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비참해야 함에도 편안한 마음이 돼요.

하지만 허한 마음이 채워지진 않죠. 히카리는 사토코 부부의 집에서 나와 이대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돈을 갚으라고 재촉 당하지 않는 곳, 범죄 혐의를 받지 않는 곳, 부모님에게 절망을 안기지 않는 곳으로. 멍하니 육교 위에서 아래를 흘러가는 차량을 봐요. 그렇게 저녁이 되고 해가 저물었나 싶을 무렵, 하늘에서 천둥 치는 소리가 나요. 두껍고 낮게 깔린 구름 너머로 울리던 천둥소리가 가까워지고, 갑자기 쏟아진 비는 히카리의 온 몸을 순식간에 적십니다. 이대로.

그 때 누군가 갑자기 등을 탁 하고 쳐요. 언제 어디부터 달려왔는지 모를 사토코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드디어 찾았다."라고. 그리고 히카리에게 몸을 기댄 채 서 있는 아사토도 보이고요. 사토코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어요. 비에 젖어 이마에 앞머리가 들러붙어 있었어요.

"정말 미안해요.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쫓아 보내서. 미안해요, 알아보지도 못하고."

 



아사토 앞에서 한껏 예민해지는 촉이 그녀를 알아보게 만들었던걸까요. 누구냐고 묻는 아들에게 사토코는 "아사토의 '히로시마 엄마'야." 라고 얘기해요. 사토코는 평소에 입양을 했다는 사실과 낳아준 엄마는 히로시마(아사토가 태어난 곳)에 있다는 얘기를 줄곧 해왔었거든요. 사토코는 히카리를 아사토의 엄마가 아니라고 단언했을 때와 똑같이, 주저도 망설임도 없이 얘기해요.

비가 차츰 잦아들더니 빗줄기가 점점 가늘어져요. 빛나는 빗 속에서, 아사토의 맑은 두 눈이 두 엄마를 바라봐요.





저는 이 책을 통해 입양 가정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어요. 작가는 책을 쓰기 위해 실제 입양 가정을 취재하고 자료를 조사했다고 해요. 실제 입양 가정 중에선 입양 사실을 숨기지 않고, 사람들은 생모를 질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를 낳아 준 덕분에 입양할 수 있었다며 생모까지 포함해 한 가족으로 여기는 집이 의외로 많다고 하네요.

오랜 불임 치료 끝 축복처럼 품에 온 아이. 사토코 부부는 히카리에게 빛을 받았어요. 그리고 빛을 잃어버린 히카리에게 사토코 부부는 그녀를 마음속에서 보호하며 혈연보다 단단한 또 하나의 가족을 만드는 것으로 또 다른 빛을 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히카리는 낳아 준 부모님과의 관계가 붕괴되어 연락도 하지 않고 살아요. 세상에는 크기도 색깔도 모두 제각각인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있죠. 내가 아는 게 전부라고 착각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새삼스레 했어요.

입양을 하는 입장 그리고 아이를 보낼 수 밖에 없는 입장 모두에 이입을 해서 생각을 해볼 수 있었던 책입니다. 올해들어 가장 흥미롭게 본 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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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외롭거나 슬퍼서 견딜 수 없을 때,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게 그 감정을 배출한다. 약자는 그 배출구로 희생된다. 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괴로울 때 자신이 만든 세계로 도망쳐 들어간다. 그리고 자신의 주관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보고 듣고 기억하는 일들을 제멋대로 비틀어버린다. 이 소설은 그처럼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이 책에서는 일단 사람을 죽이고, 그 몸을 운반하고, 다리를 꺾거나 입에 비누를 넣는 등 괴상망측한 행동을 일상처럼 일삼고 환생, 학대, 이상성욕, 트라우마 등 무거운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 점 인지하고 읽는 편이 좋겠습니다. *오늘도 스포주의*





주인공 미치오는 집에 유인물을 가져다주라는 이와무라 선생님의 부탁에 S의 집으로 가요. 하지만 거기엔 목을 길게 빼고 스스로 죽음을 택한 S의 모습이 기다리고 있었죠. 미치오는 다시 학교로 가 선생님께 이 사실을 알립니다. 그리고 선생님, 형사 두 명과 함께 집에 가니 S의 몸은 감쪽같이 사라져 있는데요. 대체 누가 가지고 간 것일까요?

 

누군가 미치오에게 말을 걸어요. "미치오!" 말을 한 사람, 아니 곤충은 다름아닌 거미였어요. 거미는 자신이 S라고 소개를 해요. 거미로 환생을 했대요. 그리고 미치오에게 부탁해요. 자신의 몸을 찾아달라고.

 

 



S와 미치오 그리고 세살배기 미치오의 동생 미카는 꽤 열심히 범인색출에 몰두합니다. 그들이 주목한 범인은 이와무라 선생님이었는데요. S의 제안으로 그들은 이와무라 선생님의 집에 몰래 침입하는 것에까지 성공해요. S의 몸을 이와무라 선생님이 가져갔을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러나 거기서 본 것은 그들이 예상치 못한 것이었어요. 어린 남학생들의 사진, 싫다고는 하지만 진짜 싫어하는 것 같진 않은 비디오 속 알몸의 S모습. 미치오는 혼란스러워합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S가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지는 않음을 인식하고 의심을 하고 또 싸우기도 해요.

S의 집 가까이에 다이조 라는 할아버지가 살아요. 다이조는 우연히 만난 미치오에게 이와무라 선생님이 쓴 자신의 뒤틀린 욕망이 담긴 책의 존재를 알려줘요. 자신의 그릇된 욕망이 세상에 드러날까 두려워 S를 죽인 게 아닐까, 미치오는 이제 거의 확신해요. 그래서 형사에게 언제 밀고를 할지 기회만 엿봐요. 그런데 진짜 이와무라 선생님이 범인일까요?





1️⃣ S
죽은 뒤 거미로 환생한 아이. 심한 사시에, 어머니와 살고 있어요. 학교에서는 따돌림을 당했어요. 아이들은 노골적으로 S에게 다가오기를 꺼려했죠. 지나가는 아이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칼처럼 날카롭게 느껴졌을까 안타까웠어요.

억울하고 억눌린 감정을 분출 할 방도가 없는 S는 결국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맙니다. 힘없는 개와 고양이를 노려 그들을 죽이는 거요. S가 살고 있는 N마을에서는 개와 고양이가 죽임을 당한 후 입엔 비누, 다리는 반대로 꺾여 있는 괴상한 사건이 9번이나 발생해요. 그런데 S는 죽이기만 했을 뿐 다리를 부러뜨리지는 않았다네요?

S가 죽인 동물의 다리를 부러뜨린 사람은 다리를 부러뜨리다 우연히 창문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S와 눈이 마주쳐요. 그 때 S는 동정과 안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고 합니다. '나와 똑같은 사람이 또 있구나.' 동질감을 느낀 것 같기도 해요. 그 후로 S는 먼저 몹쓸 짓을 하고 그 사람을 위해 지도에 자리 표시를 해 그 사람 집 앞에 놓아둡니다. 그게 그 사람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거예요.

S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데요. 이마저도 그 사람에게 알려줍니다. 마음이 얼마나 지옥같았으면 그런 행위를 하고, 끝까지 그런 걸 우정이랍시고 주다니. 하지만 따돌림을 당해 억울했던 S처럼 이유없이 죽은 동물들도 힘들고 슬펐겠죠. 그저 9개의 에피소드로 치부하고 넘어간 게 아쉬워요.

 

 



2️⃣ S의 어머니
아들의 죽음을 슬퍼합니다. 그런데 둘이 어떠한 시간을 보냈는지 장면이 하나도 나오지 않아서 'S의 엄마가 뭔가를 숨기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다행히 그런 건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S가 부모에게 받은 사랑이 턱없이 부족했음을 작가가 그렇게 전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나 싶어요.

3️⃣ 도코할머니
미치오가 고민상담을 하러 가는 따뜻한 할머니에요. 미치오가 뭔가를 부탁하면 도코할머니는 이상한 주문을 외운 후 실마리가 될 힌트를 꼭 알려주세요. 이번에도 '에이고(냄새)'라는 키워드를 알려주셔서 큰 도움이 되었지요. 하지만 슬프게도 어느 날 도코할머니는 개와 고양이가 죽임을 당했던 것처럼 끔찍한 일을 당해요. 과연 누가 그런걸까요.

4️⃣ 다이조 할아버지
다이조 할아버지가 그랬어요. 근데 다이조 할아버지는 몰랐대요. 집에 찾아오는 삼색고양이가 도코할머니일 줄. 도코할머니가 환생하여 고양이가 된 거였더라고요. S가 죽고 더 이상 부러뜨릴 것이 없자 정이 들었던 고양이에게 몹쓸 짓을 해버린 다이조.

S가 지도를 준 사람은 다이조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왜 다이조는 다리를 부러뜨릴까요?

어릴 적, 엄마가 돌아가시자 이웃집 아줌마들은 엄마를 둘러싸고 엄마의 다리를 부러뜨렸어요. 그 중 한 아줌마와 눈이 마주치고 다이조는 패닉 상태로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마는데요. 그게 실은 장례절차 중 하나였거든요. 아줌마들이 악의가 있어서 그랬던 게 아니라. 다이조는 엄마가 아줌마의 남편들과 밤늦게 어울려서 아줌마들이 복수를 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어느 날, 다이조는 엄마의 관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발견합니다. 다이조는 아줌마들에게 한을 품은 엄마가 관 안에서 스스로 나왔다고 생각했어요.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개가 끌고 갔나 그래요.) 그리고 하필이면 엄마의 다리를 부러뜨린 아줌마가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해 해를 입는 일이 발생해, 다이조는 엄마에게 엄청난 공포를 느끼고 맙니다.

노인이 된 다이조 앞에 하루는 뺑소니를 당한 한 여학생이 눈에 띄었어요. "용서하지 않을거야." 다이조를 뺑소니범이라고 오해한 여학생이 말해요. 다이조는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입니다. 그리고 엄마가 그랬듯 이 여학생이 나중에 관에서 나와 자신에게 복수를 하지 못하게 그 때 그 아줌마들처럼 다리를 부러뜨려요.

죄책감을 가지면서도 S에게 건네받은 지도의 장소에 가 매번 똑같은 짓을 저지릅니다. 다이조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인물이죠. 극심한 트라우마에 일흔이 될 때까지 시달리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또한 소중한 동물들의 생명을 앗아간 데에 대한 면죄부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무고한 다른 생명을 해치면 안되죠.

 

 



5️⃣ 미치오
미치오는 초등학생임에도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가여운 아이예요. 어렸을 때 엄마를 깜짝 놀래켜주고 싶어 했던 장난이 엄마 뱃속에 있던 아기를 유산시키는 결과를 낳은 후 엄마에겐 투명인간보다 못 한 취급을 받아요. 엄마는 항상 미카만 찾아요. 미치오의 동생이요.

그 일이 있은 후 엄마는 다시는 임신을 못 하는 몸이 되었는데 어떻게 미카를 낳았을까요? 엄마는 인형을 보고 미카라고 부르고, 미치오는 도마뱀을 보고 미카라고 불러요. 둘 다 정신병에 걸린거예요.

미치오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 라며 미카를 부러워 합니다. 아빠는 늘 피곤한 눈을 한 그냥 함께 생활하는 사람이에요. 미치오의 엄마가 미치오에게 퍼붓는 악담은 상상을 초월하는데요. 미치오가 기분 나쁜 것을 보았다고 하자 '너보다 기분 나쁘니?', S사건의 목격자라는 걸 알게 됐을 땐, '이번에도 네가 죽였지?' 하지만 미치오는 순한 양처럼 그 자리를 뜨거나 담담히 받아들일 뿐이었어요.

미치오는 거미가 된 S, 도마뱀이 된 미카, 고양이가 된 도코할머니, 곱등이가 된 다이조 할아버지를 병에 넣고 돌봐주어요. 모두 외로움과 공허함이 만들어 낸 것들입니다.

이야기 후반부에 다이조 할아버지를 무섭게 몰아부치는 미치오의 분노가 인상적인데요. 그게 그 아이의 본모습이 아닐까 싶었어요. 그리고 사실 S는 미치오 때문에 죽었답니다. 학교에서 연극을 하기로 했는데 미치오는 연극이 하기 싫어서 S의 집에 가서 S에게 죽어주면 안 되겠냐고 했어요. 그 말을 듣고 S는 그렇게 된 것이고요. 미치오는 왜 이런 아이가 된걸까요.


"저뿐만이 아니에요.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 속에 있잖아요. 자신만의 이야기 속에요. 그리고 그 이야기는 항상 뭔가를 숨기려고 하고, 또 잊으려고 하잖아요."


저는 부모에게 원인이 있다고 생각해요. 한참 사랑을 받아도 모자랄 나이에 무시를 당하고 인정받지 못해서 얼마나 서글프고 화가나고 원망스러웠겠어요. 사람이 사람답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사랑이 필수인데 말이에요. 아이에게 부모는 신이라고 하잖아요. 신이 자신을 외면해버리면... 거기다 미치오의 신은 미치오에게 악담을 퍼부었어요.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이 들었겠죠. 그래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 도피했던거고.

슈스케의 소설에는 인간의 생각과 착각, 잘못 듣는 것들이 진상을 가로막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등장한다. 우리 인간이 사소한 생각에 쉽게 좌우되고, 보지 않았는데 보았다고 생각하고, 하지 않은 행위를 했다고 생각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독자는 인정사정없이 철저히 깨닫게 된다.


늘 생각을 조심해야겠단 생각을 했어요. 내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생각이라고 다 옳은 건 아니라고 누가 그랬는데, 내가 알고 있는 사실도 정말 참인지 객관적으로 따져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 같아요.

저도 제 생각만으로 일, 관계를 그르친 적이 몇 번 있어요. 내 생각이 내 주관에 의해 해석된 것인지 남들이 들어도 납득할 만한 일인지 이제 잘 가려야겠죠.

그나저나 다이조, 미치오의 트라우마가 만든 결과는 그야말로 참혹하네요. 트라우마 관리도 필요한 것 같아요.

끝으로... 이야기가 맥거핀으로 이용만 되고 스르르 사라져버린 것이 있어요. 이와무라 선생님의 악취미. 어린 아이들을 상대로 그런 짓을 하는 건 악질 중에 악질이죠. 그것도 선생님이. 근데 책에서는 이와무라 선생님이 범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그 내용도 자연스럽게 묻혀졌어요. 생각할거리나 교훈을 주었으면 좋았을텐데 아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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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국내 개봉 된 데이빗 핀처 감독의 <나를 찾아줘>는 극장 상영 후 관람객들의 높은 평점과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나도 별 생각 없이 영화를 보러 들어갔다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멍한 상태로 조용히 극장을 나왔던 기억이 난다.

<몸을 긋는 소녀>로 데뷔한 길리언 플린은 전 작품 영화화 확정으로 할리우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선정된 바 있다. 또한 '피가 난무하지 않는 서스펜스를 쓸 수 있는 작가(월스트리트저널)'라는 극찬에 걸맞게 그녀의 이야기는 더없이 조용하고, 나긋나긋한 여성들만의 분위기가 짙게 깔려있다.

<나를 찾아줘>에서 주인공 역을 소화한 배우의 온화하지만 지독하게 차가운 표정이 아직도 눈 앞에 아른거리는 걸 보면 저자는 <몸을 긋는 소녀>에서의 아도라와 카밀에게도 '양날의 칼'을 쥐어준게 틀림없다.

그들은 3대에 걸쳐 모녀간의 애증이 비극으로 치닫는 과정을 그들도 모르는새 여과없이 보여주었는데, 킬링타임용 장르 문학을 선택함으로서 현실의 두려움을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앤과 내털리의 범인 찾기에 몰입 시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았던 것 같다.

이야기는 시카고에서 일하고 있는 카밀이 사건 취재 차 자신이 살았던 윈드 갭으로 이동하면서 시작된다.

가족과 친구가 있는 윈드 갭에 카밀이 쉽게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그 곳에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마을 주민들의 동경을 받는 돼지 농장 실소유자이며 상당한 재력가이자 최고 부유층이다. 그녀에게는 앨런이라는 새아빠와, 이붓동생 엠마가 곁에 있었는데 그 누구의 환영도 받지 못한 채 마치 하숙인처럼 방을 빌려 쓰게 된다.

아도라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사건 취재를 위해 현장과 피해자 가족 등을 만나고 다니면서 그녀는 캔자스시티에서 파견 나온 강력계 형사 리처드 윌리스와 피해자 내털리의 납치 목격자, 아도라의 상류 사회 친구들, '엠마 패거리'와 여러 번 부딪히게 된다.
이붓동생 엠마는 조숙한 여중생으로 예쁜 얼굴로 술과 약을 하고 다니는 불량 소녀지만 집에서만큼은 엄마 말씀을 잘 듣는 똘망똘망하고 여린 딸이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관심이 없는지, 엄마 아도라는 언제나 고급스러운 원피스를 입고 가정부를 호출해 기름진 음식을 먹는다. 새아빠에게는 한 번도 '아빠'라는 호칭을 써 본 적이 없지만 누구도 고치라고 지적하지 않았다.

그녀는 엠마에게 발뒤꿈치가 밟히고 그녀가 먹던 사탕에 머리가 뒤엉키면서, 리처드와 여러가지 정보를 주고 받았고 마침내는 죽임 당한 피해자들의 공통 분모를 발견해내고 만다.

두 소녀들은 조용한 성격이 아니었고 아도라에게 과외를 받거나 관심을 받고 있던 아이들이었다. 그와 동시에 엠마는 죽은 자신의 여동생을 질투 할만큼 사랑 받고 싶어 하는 아이였다.

카밀은 2주가 넘는 시간 동안 윈드 갭에 머물면서 자신을 죽이고 싶어라는 아도라의 광기와, 죽은 여동생이 사실은 건강했음에도 병원에서 죽어가야만 했던 이유를 뒤늦게 알게 된다.

앤과 내털리는 과연 누가 죽였으며 뽑은 이는 어디에 숨긴걸까?

아도라는 '좋은 엄마'가면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건강한 자기 아이를 병원에 입원 시켜 아픈 아이로 만든 후 땀을 뻘뻘 흘려가며 간호했고,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남들이 봐주기를 바랐다.

희생하고, 헌신하는, 이상적인 엄마 모습.

그것은 전부 죽은 엄마에게서 그녀가 기대한 모습이었다.
이미 바람이 통하게끔 구멍이 뚫려버린 풍선에 자기 만족이라는 기름을 콸콸 붓는다. 그 기름은 그 사람을 모조리 집어 삼키고 마침내는 종식시켜 버리고 만다.

엠마는 누가 봐도 엄지를 치켜 올릴 정도로 예쁘다.
그 미모로 친구들을 휘두르고, 남자들을 주무르고, 아! 자신의 친구를 남자에게 서적으로 팔아 넘겨도 여왕처럼 추대를 받는다. 과연 부족함 없어 보이는 예쁜 이 여자 아이를 통곡하게 만들 수 있는 이가 세상에 있을까?
엠마는 아도라에게 알약을 받았다. 하늘색의 우유도 받아 먹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아도라가 엠마의 상태를 확인하러 왔을 때, 그녀는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해주었다. 그래야 모두가 행복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도라는 그 약과 우유를 카밀에게도 주었다. 그것들은 말라리아 예방약, 산업용 관장약, 항발작 알약, 말에 쓰는 진정제 등이었다. 카밀은 자신의 몸을 그어야 편안함을 느꼈기 때문에 독약임을 알면서도 그것들을 삼켰고, 그녀보다 조금 영악하고 예민한 엠마는 약을 먹고 잠든 척을 했다. 착한 어머니 노릇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아이는 죽여버리는 아도라 때문에 그녀들은 서로 다른 길을 택한 듯 보이지만 결국은 두 사람 다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낸다.
엄마에게 화는 커녕 투정 한 번 부리지 못한 카밀은 답답하고 화가 날 때면 자신의 몸 구석구석에 단어들을 각인 시킨다. (온 몸이 타듯이 따끔거려도 마음의 가시가 더 깊고 날카롭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리고 엠마는 자신이 받아야 할 관심을 다른 사람이 받을 때 깊이 분노한다. 특히 자기보다 못생기고 나약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관심을 받으면 더욱 그랬다. 그래서- 엄마를 내버려둠으로 사랑받고자 했던 행동이 다른 사람을 죽이고 말았다.
카밀 또한 엠마의 등을 씻겨줄 때, 지나치게 과잉보호를 할까봐 스스로 절제 시켜야만 했다.

이 가족을 파멸로 이끈 저주의 근원은 어디라고 해야 옳을까. 가난과 학대의 대물림도 눈에 보이는 거라면 차라리 잡아서 돈으로 처리 해버리면 쉬운 일일텐데 말이다.

저자 길리언 플린은 <몸을 긋는 소녀>외 다른 작품에서도 이러한 가족의 소통 부재로 인한 안타까움을 잘 녹여내고 있다고 한다. 그녀와 우리는 범인을 잡았지만 풀어야 할 문제는 모두의 몫으로 남겨놓았다.

가정 폭력처럼 무서운 것이 서로를 향한 무관심이라는 것. 이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껴서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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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550만 부가 판매 된 <신데렐라 카니발>의 저자 인드레아스 프란체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뒤, 다니엘 홀베는 '율리아 뒤랑 시리즈'를 이어
받아 집필하게 된다.

범죄 미스터리 스릴러 전형은 특유의 몰입감을 독자에게 달콤하게 선사한다. 안드레아스 프란체의 글은 조금 더 잔혹하며, 글 솜씨가 상당하다는데 다니엘 홀베의 이 작품은 출간 즉시 독일 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는 현지 반응과는 다르게 '율리아 뒤랑 시리즈'를 알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실망스럽다는 평판을 받았다.

 

율리아 형사를 처음 접한 나는 그녀가 가장 비중이 높은 인물임을 처음 알았다. 많은 등장인물들의 내용 전개를 책임지느라 주인공이 병풍이 되어버린 느낌?
자신의 사건전담반을 비롯해 병드신 아버지를 돌보지 못하는 데에서 율리아의 갈등이 드러났지만 경찰청 동료인 프랑크의 딸 슈테파니의 집단 따돌림 사건과 그녀의 나체 사진을 올린 범인 찾기가 더 기억에 남는건 아쉬운 부분이다.

잃어버린 소녀들을 찾는데 주축이 된 두 형사는 하이에나 같은 연쇄X인범을 잡기 위해 밤낮으로 자기 자신과 싸운다.
잘못한 것이라고는 공원에 놀러 나온 것 밖에 없는 에바가 괴한에게 납치 당한 후 왜 쓰레기 봉투에 싸여 온 몸엔 범인의 침으로 범벅이 된 채 버려져 있어야 했을까.
자신의 지하실에 금발의 어린 소녀들을 감금해 온 범인은 의외로 그녀들을 탐하지는 않았다. 그는 성불구자였기 때문이다. 대신 코를 묻고 냄새를 맡다가 침을 적시고 잔인하게 죽인 뒤 관계를 하지 못하는 대신 받는 보상처럼 피를 핥아 먹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의 천재성에 반하는 육체의 열등감이 그를 미치게 만들어 버렸는지 모르겠다.

 

 

잔혹한 범인들의 표면적인 이유야 사람마다 각기 다르겠지만 열등감, 복수심, 비뚤어진 자기애는 언제나 공통적인 것 같다.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피해를 보는 사람들을 위해 건강한 사회에서 옳은 생각을 하고 살 수 있도록 개개인이 힘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갑작스레 떨어진 화장지처럼 끊임없이 출현하는 범죄자들을 매일 접하는 사람들도 새삼 위엄있게 다가온다. 작은 단서를 놓치지 않고 끝까지 추적해서 마침내 범인을 검거한 그녀의 직업 정신이 빛이 났고, 그런 그녀를 탄생 시킨 안드레아스 프란츠의 '율리아 뒤랑 시리즈'가 궁금해졌다.

제목부터 섬뜩한 작품들이 많아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이 찾아보는게 좋을 것 같아 기재하지 않겠다.
비록 이 작품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실망스럽다는 평판을 받았지만 독일에서는 무려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었다.
다른 작품에서의 그녀를 만나면 혹자도 느낄 것이다. 미스터리 스릴러를 집어 드는 독자의 마음을 안드레아스 프란츠가 알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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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일본을 대표하는 소설가 히가시노게이고가 추리 소설을 낱낱이 파헤치고 나섰다.

밀실 X인, 다잉 메세지, 무대의 고립, 토막 X인, 동요 X인 등 책을 읽는 우리 모두는 그것을 이미 "뻔하다"거나, "진부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마치 금기사항이라도 된 듯 누구도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현재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만화 '명탐정 코난'을 예로 들면, 제대로 된 추리와 범인을 잡은 적이 없는 형사와, 범인을 지목해야 할 때 바닥에 픽 하고 쓰러져 틀리지도 않고 언제나 정답 만을 얘기하는 명탐정, 그리고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또 모처럼 놀러간 휴가지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는 X인 사건들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하지만 그렇게나 많은 추리소설에서 주요한 장면들이 반복 되었음에도 장소만 살짝, 트릭의 스케일이 살짝 달라질 뿐인 또 다른 책을 집어드는건 어째서일까.

히가시노게이고는 데뷔작 이후 20년이 넘는 작가 생활 동안 50여편의 작품을 써낸 일본 추리소설의 거장이다. 추리소설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수십여편 속 수백천명의 범인을 만나봤단 뜻이다. 그는 명백한 작가임에도, 이 책에서는 독자의 입장에 서 '이상하다고 느끼지만 깊게 생각하기 귀찮은 것'들을 우리를 대표하여 으름장 놓아준다.
아는만큼 보인다고, 무언가에 깊이 골몰한 시간이 남들보다 탁월한 누군가 그것을 신랄하게 비판하니 십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야기 전개는, 명탐정 덴카이치 다이고로와 지방 경찰 본부 수사 1과 경감 오가와라 반조가 여느 추리소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X인 사건을 처리해 나가면서 중간 중간 '도저히 못 참겠다!' 싶다고 느껴질 때 책에서 나와, '죽기 전에 다잉메세지는 왜 남기는거야? 그리고 의문스러운 메세지를 남길 바에는 차라리 범인 이름을 적는게 더 낫지 않아?' 라고 하소연을 하고, '그래, 이렇게나 추리소설의 규칙을 파헤쳤으면 이제 더 이상 나올 것도 없겠다.' 고 생각 할 찰나, 정말이지 예상치 못한 등장인물이 범인이 되어 반전을 선사하기도 한다.

탐정 추리 소설의 경우 주인공이 죽어서는 안 된다는 법칙이 있기 때문에 마지막 장에 나타난 '추리소설에서 방귀 깨나 뀌는 사람들'의 대거 출연은 소재거리에서부터 신선하다고 느꼈다.
자기 자신이 추리소설을 쓰는 사람이라서 작가와 독자가 적당히 서로를 속이고 책장을 넘기는 것을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자기 성찰과 비판의 무대를 써내려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추리소설의 특징상 이전과 판이하게 다른 장치가 생긴다면 부자연스러울 것이 자명하다. 이렇듯 작가에게도 늘 숙제 같은 고충이 있을 걸로 생각되는 한편, 독자인 나는 추리소설의 한정적인 작법을 보면서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주는 작가를 남몰래 구별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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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로 큰 사랑을 받아 우리나라에서도 영화화 된 <안녕, 헤이즐>은 영화를 보지 않았어도 너무나 유명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영화의 리뷰를 보니, '한동안 여운이 남는 멋진 영화', '따뜻한 듯 아픈 영화', '삶에 대한 생각과 태도가 달라지게 하는 영화' 등의 극찬이 주를 이루었는데 책을 보며 내가 느낀 작가의 이야기 방식이 그의 작품을 접하는 모두에게 비슷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리라고 생각한다.

'이름을 말해줘'에서 그는 같은 이름의 여자만 19명을 사귀는 신동을 통해 사춘기 소년소녀의 풋내기 사랑과 어설픈 실수, 찬란하고 아름다운 청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신동소리를 듣고 자란 19살의 콜린은 사랑을 '수학적 그래프 공식'으로 만들어 19명의 캐서린에게 차인 이유를 알게 되길 원했는데 그와 더불어, 공식을 만듦으로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 싶다'는 명백한 사실을 콜린 스스로 실토했던 부분이 현실적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콜린이 무려 19번이나 같은 이름의 다른 사람에게 차이는 기분을 나는 잘 모르지만, 친한 친구와 자동차 여행을 한다고 긴 시간 집을 떠나있는건 당연해 보인다. (그것은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제대로 된 형태로 만져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이다.) 물론 19살의 콜린이 한층 성숙되기 위해 하산과 여행을 떠난 건 아니었겠지만 여행을 통해 우연히 만나게 된 여러 사람들로 인해 콜린은 많은 것을 배웠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유레카!"라고 외치는 콜린에게 하산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다. 사랑은 공식화 될 수 없다는 걸 설득하지 않는 일도 친구 입장에선 쉬운게 아니었을텐데 콜린은 친구도 참 잘둔 것 같다.

어느 날 콜린은, 솔직하고 순수한 소녀 린지에 끌려 양아치 '또다콜(또 다른 이름의 콜린)'을 물리치고, 캐서린이 아닌 여자와 컴컴한 동굴에서 단 둘이 뽀뽀를 하기에까지 이른다. 콜린이 이제까지 19명의 캐서린을 만나왔던 건, 그저 우연이었다고 콜린은 이야기 하지만 필연으로 만들어낸 인위적인 과거 반복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생각해보면, 지나왔던 캐서린들을 학문처럼 공부했던 것이 어쩌면 19번이나 차일 수 있었던 이유가 될 수도 있지 않나.

난생 처음 캐서린이 아닌 여자와 뽀뽀한 순간, 콜린은 비로소 미래를 바라볼 수 있었다.

콜린이 우연한 여행을 계기로 강박에서 벗어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건샷(머물렀던 장소)을 떠나는 장면이 아직도 눈 앞에 아른거린다. 하산과 자동차 여행을 하러 처음 건샷에 왔을 때 얼굴에 가득했던 근심은 어딘가로 묻혀버리고,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와 설렘의 아우라가 온 몸 곳곳에서 피어났다. 사랑은 손가락이 아닌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는 당연한 말이 새삼 교훈처럼 느껴진다.

더불어 등장인물들이 미성년자여서 더없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장면들이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다.

19살의 콜린, 하산, 린지, '또다콜'은 이제 겨우 첫 발을 떼었기에 나로서는 그저 부러워서 심장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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