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는 17살입니다.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조부모님 손에 길러졌어요. 하지만 조부모님마저 돌아가시게 되자 경주에게는 이제 함께 살았던 이 집만이 남았습니다.

 


집에 와서 하는 일이라곤 할머니 할아버지 속 긁어놓기, 돈 가져가기 밖에 없었던 삼촌이 찾아옵니다. 이 집 팔자고요. 그런데 왜 그걸 경주한테 말하느냐고요? 조부모님이 경주에게 유산으로 이 집을 남겨주고 가셨기 때문이에요. 비로소 경주가 서류에 도장을 찍어야만 집이 팔리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경주는 집을 팔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조부모님의 마지막 유언이었거든요. 삼촌은 고함을 지르거나 위협을 가하는 등의 방법으로 그녀에게 강요합니다.



"이 집은 절대 안 팝니다."

 

 

 

어디 어른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느냐고, 너는 애가 왜 이렇게 고집이 세냐고, 네가 뭐라 해도 결국 이 집을 팔게 될 거라는 삼촌의 말과 경주의 대답이 핑퐁처럼 최소 열 번 이상은 이어집니다. 경주도 참 대단해요.

 

애 vs. 어른


경주는 열 일곱살입니다. 삼촌은 서른이 넘었고요. 법적으로 한 명은 미성년자고 한 명은 어엿한 성인이지요. 그런데 이들의 태도를 한 번 보세요. '내가 가진 것은 노트북이나 비싼 패딩이 아니고 집이다. 자산이다.' 집을 소유했다는 것을 인지한 후 행동과 말투를 달리하는 이 고등학생. 꼭 필요한 말만 하고, 정확하게 행동하고, 분명한 태도를 보이려고 매사에 주의하는 경주는 어설프나마 어른스럽게 행동하려고 합니다.

대조적으로 삼촌은 상대방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적당히 구슬리면 될 거라고 생각해 철없는 행동을 하지요. 소리를 지르고, 발을 쾅쾅 구르고, 문을 세게 닫고 나가고, 으름장을 놓고, 제 딴에 무서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에요. 경주는 생각합니다.

 

나는 삼촌이 좀 더 지적이고 근사한 방법으로 나를 설득해 주기를 바랐다.

 

 

 

새삼 별스러울 것도 없어요. 세상엔 나잇값 못 하는 사람들 천지니까. 오히려 아이가 더 어른스러울 때가 있기도 하죠. 나이가 어른임을 증명하는 건 진짜 아닌 것 같아요. 어른은 어른답게 행동하고 자신과 남들이 인정해줄 때 붙일 수 있는 말 같습니다.

 

고모와 순지


고모와 그의 자녀 순지가 집에 찾아옵니다. 할머니가 물려주신 아파트를 말아먹고 갈 곳이 없었거든요. 고모도 처음엔 이 집을 팔고 세입자를 들이거나 이 자리에 새 집을 짓자고 설득 해요. 하지만 경주의 의지가 너무나 올곧았기 때문이겠죠. 고모는 적어도 삼촌처럼 끝까지 막무가내는 아니었습니다.

순지는 경주의 친구예요. 그도 처음엔 집을 파는 쪽에 생각이 기울어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삼촌이 저렇게 나오는데 결국은 팔게 되지 않을까, 하고요. 하지만 순지는 그렇게 생각을 했다 하더라도 아무런 힘이 없었어요. 미성년자였으니까요. 그는 종종 경주의 말동무가 되어줍니다.

고모부


경주 입장에서는 매일이 자연재해와 같은 하루 하루였겠지만 독자 입장에선 꽤 순탄한 전개였다고 생각합니다. 고모부가 등장하기 전까지는요.

고모부는 고모와 이혼한 사이예요. 이미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있죠. 그런데 왜 이 집에 찾아온 건지 모르겠어요. 게다가 길진 않지만 이 집에 잠시 잠깐 함께 살 거라네요? 이 집을 팔면 어마어마한 돈이 생기거든요. 정말이지 그 '돈'때문에 나잇값 못 하는 어른들이 하나 둘씩 생겨 나는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스포가 될 수 있겠습니다. 책을 읽으실 예정이신 분들은 이 부분 패스하시길 바라요. 거의 종반부에 고모부는 대단한 결심을 하나 하는데요. 아무리 설득을 하고 겁을 줘도 경주는 눈 하나 깜짝 안 하잖아요, 여기서 정말 못난 행동이 나옵니다. 삼촌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요.

그건 바로 경주를 지하 창고에 가두는 일이었어요. 집 서류를 넘겨주면 문을 열어준다네요. 삼촌은 옆에서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느냐'며 고모부를 말렸지만, 내심 이렇게 해서라도 일이 해결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을거예요. 결국 경주는 하루 반나절 정도를 창고에 갇혀 있게 됩니다.

경주를 꺼내준 사람은 근처에 사는 성이 할머니였어요. 사실 꺼내준 건 아닙니다. 성이 할머니는 경주 할머니가 돌아가신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분이 아니었거든요, 치매에 걸리셔서요. 자주 경주네 집에 와 정원을 손질하고 성이와 함께 돌아가시곤 했죠. 할머니가 창고로 다가가자 성이가 "할머니?"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이었어요.



 

 

그 이후 고모와 고모부, 삼촌은 난리가 납니다. 경주가 듣고 있는지도 모르고 한바탕 말싸움을 해요. 고모는 삼촌에게 말합니다. 경주의 엄마 아빠가 죽은 건 너 때문이라고. 네가 경주의 엄마 아빠를 그 날 하필 불렀기 때문에 보러가다 사고가 난 거라고. 경주의 아빠가 할아버지 눈에 드는 게 네 입장에선 눈엣가시 아니었느냐고 말해요. 삼촌은 아빠가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고 항변했지요.

이 집을 주축으로 경주의 부모님, 조부모님, 삼촌과 고모 등은 불편하게 얽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집도 나름의 비밀을 감추고 있었죠. 할아버지의 친구가 망하는 기회를 이용해 지어진 집이라는 게 삼촌의 단골멘트였어요. 그리고 그 친구가 찾아와 실수로 자신의 팔을 칼로 스쳤을 때 나온 피 때문에, 할아버지가 평생 삼촌의 요구를 들어주고 살아왔다는 사실도 경주는 어른들의 말싸움을 통해 알게 됩니다.

고모부는 지하 창고 사건 이후 집을 나가요. 그 날이 모두에게 전환점이 되어주긴 했나 봐요. 가장 큰 변화는, 삼촌이 달라졌거든요. 아무래도 조카를 창고에 가둔 건 아무리 인간 말종이라도 양심에 찔리는 일이었긴 했나봅니다.

삼촌과 나는 여름의 질서 속에 한참을 고요히 서 있었다. 삼촌이 어깨를 한 번 들썩이더니, 비밀이라도 말하듯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내가 잘못했다." 삼촌은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현관을 향해 돌아섰다.


다행이죠. 그런데 이제까지 경주가 마음 고생한 건 어디서 보상을 받을 수 있나요? 철이 없기로소니 고등학생 조카 앞에서 자신의 철부지 같은 행동을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나 싶습니다.

이 책을 덮고 씁쓸했던 이유는 이 책에 나오는 삼촌, 고모부, 고모 같은 어른들이 상당히 많다는 현실 때문이었어요.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건 저도 누군가에겐 이렇게 지긋지긋한 사람일 지 모른단 사실...)

진짜 어른은 어떤 사람을 일컫는 말일까요? 책에서 경주는 소중한 것을 자신의 소신을 걸고 지켜내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지 않으면서 자신의 뜻을 관철 시키는게 꽤 어른스러워 보이긴 했어요. 책에서 던지는 질문은 아니긴 하지만요. 생각해 볼만한 물음인 것 같아요.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나는 물론이고 타인을 배려해야 한다는 생각이 짙어집니다. 나와 타인에 대한 배려. 이 균형을 맞추는 삶을 살고 싶네요.



 

 

끝으로... 제목에 대해 생각해봤어요. 왜 '나로 만든 집' 일까. 이 집은 말그대로 '경주'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목숨을 걸고라도 지키려고 했던 게 아닐까요? 나는 내 몸도 있지만, 생각도 있고 의지도 있고 신념도 있죠. 경주의 그 모든 것이 이 집을 이루고 있던 것이라고 생각해요. 결국은 아무도 이 집을 허물 수 없었습니다. 경주가 경주를 포기하지 않아서 아무도 허물 수 없었어요. 힘들었겠지만 끝까지 자신의 소리에 귀기울여 준 경주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어요.

이 책을 청소년들이 읽는다면, 많은 것을 가지고 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자신의 옳다고 생각되는 소신을 어른들 중에도 나잇값 못 하는 덜 큰 어른들의 말을 듣고 꺾지 마세요. 그저 나이만 먹은 어른들에게 굴복하지 않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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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작품을 또 읽고 말았습니다. 그녀 덕분에 '심리스릴러'라는 장르에 흥미가 생겼거든요. 제 글을 보아오신 분들은 저자의 이름이 낯설지 않으실거예요.

 

 

[책] B. A. 패리스 - 비하인드도어 리뷰, 가스라이팅으로 버무려진 자극적인 심리스릴러 소설

제목은 생소할 수 있어도 이 표지는 익숙한 분들 많으실텐데요. 요즘 광고 많이 하잖아요, SNS에서. 저도 광고로 이 책을 처음 알았어요. 반은 속는 셈 치고 읽었는데 읽기를 잘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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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B. A. 패리스 - 테라피스트 리뷰, 죄책감은 무서운 감정이에요

그녀의 <비하인드도어>를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다른 작품도 읽어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비하인드도어가 더 재밌었네요. 이 책의 묘미는 후반부에 모두 몰려있는 것 같아요. '누가 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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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으로도 이미 유명한 작품들인데 제가 리뷰한 바 있거든요. 아직 못 보셨다면, 참고 해주시길 바라고요. 오늘은, 브레이크다운입니다. 역시나 이번에도 가스라이팅이 난무해요. 특히 이번에는 제가 범인을 맞추지 못 할 정도로 주인공인 캐시 만큼이나 맘고생을 많이 했는데요. 심리적으로 힘들더라고요. 과연... 어떤 내용이었을까요? 소개해볼게요. 참고로 <스포주의>입니다.

줄거리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날, 캐시는 숲속을 관통해야 하는 블랙워터라는 길을 선택해요. 남편 매튜가 절대 그 길로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요. 그 결과, 캐시는 그 곳에서 웬 여자와 눈이 마주치게 됩니다. 멈춘 차 안에서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던 여자... 누구였을까요?

비가 너무 많이 내려 당시에는 알지 못 했어요. 하지만 곧 뉴스 보도를 통해 알게 됩니다. 그 여자는 자신과 함께 점심을 먹은 적이 있는 제인이었다는 사실을요.

캐시는 죄책감에 휩싸입니다. 당시 무언가 이상했는데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고, 집에 돌아가 경찰에 신고해야지 해놓고도 잊어버렸어요, 경찰이 증인을 찾을 때도 뒤늦게 나섰고요. 그래서 그녀는 심리적 압박에 시달려요.

게다가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은 상태인데, 타살이었대요. 그가 캐시의 차 번호를 외웠으면 어쩌죠? 그럼 자연히 집 전화번호도 알 수 있게 되는데요. 그 이후 캐시네 집에는 침묵의 전화가 매일 걸려옵니다.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면 상대는 아무 말을 하지 않는거예요.

캐시의 어머니는 치매를 앓다가 돌아가셨어요. 어머니의 병수발을 해 온 캐시는 그 병의 무서움을 알기 때문에 자신에게도 그런 일이 생길까 몹시 걱정하는데요. 그런데 실제로 요즘, 자꾸만 의심스러운 일이 생깁니다. 사람들과의 약속을, 기계 사용법을 잊어버려요. 구매한 물건을 사고 또 사서 주위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하고요.

분명히 놓여있던 칼이 다시 돌아와보니 없고, 외출하고 와 보니 컵의 위치가 바뀌어 있고, 조용한 집 안에서 나는 기척을 기묘하게도 그녀만 겪어요. 그래서 그녀는 범인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제가요, 캐시만큼이나 맘고생을 했다고 했었잖아요? 그런데 상황이 그래요. 캐시 입장에서는 약속을 하지 않았는데 성립이 되어 있고 느닷없이 기계가 말을 듣지 않고 뜬금없는 물건들이 도착해 있는거예요. 하지만 이렇다할 이유는 딱히 모르겠으니 내 잘못인 것만 같고...)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 레이철은 그녀가 이렇게 힘들어 할 때마다 위로를 해줍니다. 어느 날은 두 사람이 점심을 함께 먹으려 하는데 화장실에 다녀온 레이철이 급히 가 볼 데가 있다는거예요. 그리고 그녀가 나가자마자 웬 학생이 다가와 '제 친구가 당신의 친구 핸드폰을 훔쳤어요, 미안해요.' 라며 사과하죠.

핸드폰 속에는 캐시의 남편인 매튜와 레이철의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는데요. 이제까지 캐시를 곤궁에 빠뜨렸던 모든 상황의 작전도 함께 적혀 있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예요.



 

 

캐시는 분노합니다. 창고에 칼이 하나 있었는데, 언론에 보도 된 실제 사건 현장에 사용된 칼이었어요. 그 칼은 왜 그 집 창고에 있는걸까요? 매튜가 범인이어서? 매튜와 연인인 레이철이 범인이어서? 캐시는 두 사람에게 복수를 하려고 레이철의 행주로 칼을 감싸고, 매튜가 범행 당시 집에 있었기는 하나 정말 그랬는지는 모르겠다는 말을 경찰에게 늘어놔요.

범인이요? 레이철이었습니다. 저만큼이나 캐시도 놀라요. 그저 복수하고 싶었을 뿐인데, 정말 그녀가 그랬을거라고는 생각지 못 했었거든요. 레이철은 캐시의 부모님이 제 2의 딸이라고 했을 정도로 그녀를 예뻐했는데, 자신에게는 유산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에 화가나 캐시의 돈을 빼앗기로 매튜와 모의한 거예요. 그런데 매튜와 자신의 관계를 제인이 알게 되고, 그 사실을 캐시에게 말하겠다는 그녀를 죽이게 된... 그런 연유였던거죠.

참고로 매일 집에 전화를 걸어오던 사람은 매튜였습니다. 레이철 못지 않게 매튜도 어마어마해요. 그는 캐시와 한 집에 살았던 사람이에요. 캐시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동시에 가하는 가스라이팅이, 돌이켜보니 너무나 자연스럽고 소름끼쳐 혐오감이 들더라고요.


주인공, 캐시



 

그녀는 끝까지 불쌍하기만 한 건 아니었습니다. 문자를 보고 난 뒤 이제까지 자신의 생각과 어긋났던 사람을 모두 다시 찾아가요. 그리고 묻습니다. 내가 정말 그렇게 말 했었느냐고. '아니? 네 친구가 그러던데?', '남편이 그러던데요?' 사람들은 대답하죠. 나도 엄마처럼 치매에 걸린 건 아닐까 스스로를 의심하던 캐시. 그녀는 정상이었습니다. 망상증 환자도 아니었어요.

그리고 마침내 그들에게 복수를 하죠.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상황을 연출하고 제 3자가 그들을 이상한 사람인 것처럼 바라보게끔 만드는 수법. 그러다 운 좋게 제인 사건의 범인이 밝혀진거고요.

만일 내가 그 핸드폰을 받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두 사람이 어떻게 나를 배신했는지, 지금으로서는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슬픔에 빠져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못하게 될까봐 두렵다. 점박이 암소(가게 이름)에서 수화기를 통해 매튜의 목소리를 듣고 모든 속임수의 실타래가 풀리던 순간, 결심한 것이 있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편과 가장 친한 친구 두 사람을 동시에 잃어 속상한 마음이 컸을텐데 분노를 동력 삼아 진정한 복수란 이런것이다, 본때를 보여준 게 아주 멋져요.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으세요?

 

 

레이철



 

처음부터 제인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을 거예요. 이제까지의 일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까봐 그랬겠죠. 캐시의 돈을 뺏어야 하는데 매튜와의 관계가 들켜버리면 안 되니까 그녀의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엄연한 범죄를 두둔할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요.

아빠가 레이철에게 유산을 남기지 않아 얼마나 소외된 기분을 느꼈을지, 내가 이해했어야 했다. 어떻게 그렇게 무심할 수 있었을까?


부모님을 여의고 캐시의 부모님에게 사랑을 받고 자란 레이철. 제 2의 딸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란 그녀도 그들을 진짜 부모처럼 의지하고 따랐던걸까요? 진한 배신감으로 인해 일어난 비극이에요. 어떻게 나에게는 유산을 남기지 않을 수 있는지 레이철은 이해할 수가 없었대요.

사실 캐시는 레이철의 마흔 살 생일 선물로 집을 사 두었어요. 생일에 맞춰 주려고 했던 거지요. '선물을 조금 더 일찍 주어야 했던 걸까?' 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레이철은 착한 친구를 두었었답니다.



 

 

남편 매튜는 레이철에게 끌려다닌 인상을 남겼기 때문에 따로 언급을 하지는 않을래요. 저는 처음엔 매튜가 범인인 줄 알았어요. 캐시가 집에서 이상한 일들을 겪을 때마다 그녀를 위로할 뿐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는 않았거든요.

그러다 나중에는 캐시가 범인이 아닐까도 생각 했었습니다. 건망증이 너무 심해 제인을 죽인 이유를 무의식 중에 잊어버린 건 아닐까 싶었어요. 친구 존이 범인인 것 같기도, 범인은 따로 있는 것 같기도 했는데, 제 머릿 속 용의자 선상에 레이철은 없었기에 결과가 더욱 충격으로 다가왔었습니다.



 

 

저는 이번에 깜빡 속아 넘어갔어요. 여러분은 어떠셨어요? 초반에 눈치를 채버려서 책 자체가 재미 없었다는 분도 계셨는데, 저는 그 분이 눈치가 참 빠른 분인 것 같아요.

이전에 읽었던 저자의 책들과 비교하면 흡인력은 역시나 마지막 100장 정도에 몰빵이 되어있었던 것 같고요. 소재는 역시나 참신했습니다. B. A. 패리스는 일상 생활에서 벌어지는 막장 스토리를 너무나 잘 풀어 써요. 어딘가에서는 정말 일어날 것만 같은 일들이에요.

저는 이 책을 읽으며 이은해 사건이 생각 났습니다. 내가 믿고 소중히 여기는 누군가가 나를 가스라이팅 하고 있다면. 언젠가부터는 그 사실을 내가 눈치를 채겠지만, 그 때 즈음엔 이미 내가 나보다 그 사람을 더 사랑하고 있어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가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임을 깨닫게 되지요. 심리를 조작해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것은 아니, 사람의 기능을 망가뜨려 놓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을 가지고 놀겠다는 말과 같은데 이건 개중에서도 아주 사악한 짓 같아요.



 

 

의사마저도 두 사람의 계략에 놀아나 그녀가 정신증 환자인 줄 알고 약을 처방해 주었습니다. 만약 내가 캐시의 입장이라면, 이 세상에 나 말고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고 있다면...

내가 나를 끝까지 믿어줄 수 있을까요? 세뇌가 얼마나 무서운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B. A. 패리스의 책을 읽을 때마다 느껴요. 내가 내 말을 잘 들어줘야지. 나를 더 많이 사랑해줘야지, 하고요. 이번에도 역시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글을 참 맛깔나게 쓰는 이 작가. 피 한 방울 안 나오는데 어쩜 그렇게 사람을 피 말리게 하는지 몰라요. 리뷰는 이만 마칠게요. 제 글을 읽고 궁금한 점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댓글 남겨주세요. 읽고 내려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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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하라는 미즈타니를 '신'이라고 부릅니다. 사토하라 뿐만이 아니에요. 반에 있는 모든 아이들이 미즈타니를 신라고 불렀는데요. 왜일까요?

미즈타니는 우리가 난관에 봉착했을 때 해결책을 주어 무사히 지나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들먹거리지는 않아요. 그런데요, 재미있는 사실 하나 알려드릴까요? 그 신이라는 미즈타니하고 사토하라는요... 초등학교 5학년이에요!


5학년이 추리소설의 주인공이라고?!





그래도 저자는 어거지를 부리지는 않습니다. 코난처럼 괴상한 약을 먹고 현탐정보다 사건을 더 잘 해결하는 그런 비현실적인 요소를 넣진 않았어요. 그들은 정말 초등학교 5학년 같습니다. 신이라고 불리우는 미즈타니만 또래보다 조금 더 지혜로운 느낌이랄까요? 그렇다면 과연 신은 어떤 사건들을 해결했을까... 궁금하지 않으세요?

1부 : 봄을 만드는 법



어느 날, 사토하라는 실수로 할아버지의 벚꽃절임 통을 깨뜨려요. 그건 돌아가신 할머니가 만들어주신, 할아버지가 무척 아끼는 것이었는데 말이예요. 사토하라는 미즈타니를 찾아갑니다.

그는 솔직하게 말하거나 다시 만드는 등의 방법이 있다며 보기를 알려주고 사토하라에게 선택권을 줘요. 그래서 사토하라는 할머니를 떠올리며 새로이 만들기로 결심하는데요. 하지만 반전은 없었어요, 결국 할아버지께 들키고 맙니다. 제법 비슷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그건 벚꽃이 아니라 아몬드꽃이었거든요. 꽃 모양이 닮아 신이 실수한거예요. 그래도 결과는 그닥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추억을 떠올리는 듯한 모습으로 '네가 기억하고 있구나'라고 말씀하셨어요. 자신은 할머니의 레시피를 잊어버렸다며 종종 속상해하곤 하셨거든요. 결국 들키긴 했지만, 다시 만들길 잘한 것 같죠?

벚꽃절임이라는 음식이 계속 나와 이미지와 향을 떠올릴 수 밖에 없는 향긋한 에피소드였어요. 읽는 내내 향이 떠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보셨다시피 신은 꽃을 잘못 알아보는 실수를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토하라는 그를 존경하고, 좋아하고, 함께 다니는데요. 흐물흐물, 단단하지 않은 그 마음이 저는 오히려 현실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우정은 계속됩니다.

2부 : 여름의 '자유' 연구



가와카미는 중독에 빠진 아빠를 게임 가게에서 퇴출 당하도록 도와달라는 요청을 해요. 미즈타니는 그녀의 부탁 뒤에 숨은 진짜 의도를 눈치채는데요. 그녀는 쓰레기장 같은 집에서 학대를 당하고 있는 아이였거든요.

그녀가 원하는대로 아빠가 그 가게에서 퇴출을 당하면요. 집 뒷 문을 이용해 갈 수 있는 게임 가게에 가게 될 것이었어요. 그래서 그가 지나는 길의 계단 하나를 일부러 미리 없애놓고, 남몰래 죽이려는 속셈이었던 거지요.

그녀는 그림을 몹시 잘 그렸어요. 그 자리에 자신이 그린 계단 그림을 하나 채워넣으려고 했던겁니다. 신은 말립니다. 네가 만일 그 일에 네 그림을 사용한다면, 너는 두 번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될 거라면서요.

하지만 신은 그녀의 생각 자체를 비난하진 않아요. 그런 사람은 죽어도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반면, 사토하라는 정말로 평범한 초등학생인데요. 가만히 듣고만 있던 그가 그런 말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 보호소 같은 곳에 가 있으면 어떻겠냐는 현실적인 제안을 합니다. 하지만 가와카미는 보호소에 가지 않고, 학교에도 나오지 않고 종적을 감춰요. 그리고 학교에는 그녀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지요.

이것으로 이 에피소드는 끝이 나는데요. 후에 그녀의 이름이 또 한 번 나옵니다. 이 2부에서 신의 공감능력이 두드러졌다고 생각해요. 만약 어른이었다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5학년이잖아요?

3부 : 작전회의는 가을의 비밀



이 에피소드에서는 신의 지혜로움과 배려심이 드러납니다. 그는 가을 운동회 기마전에서 작전을 짜는 역할을 맡게 돼요. 머리에 땜빵이 있는 친구가 수비만을 하도록, 괜히 공격을 하러 갔다가 친구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지 않도록 그에게 유리한 작전을 짜주죠.

그가 속한 팀이 승리를 하게 되고, 작전을 짠 미즈타니에게 반 친구들은 또 한 번 '신'이라고 말하는데요. 독자들은 분명 그 친구들보다 더 놀랐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끝까지 따뜻한 마음을 감춰요. 그 모습이 참 인상적이더군요. 개인적으로 이 3부에서 저는 미즈타니를 '신'이라고 부르고 싶었습니다.

4부 : 겨울에 진실은 전하지 않는다



2부에서 사라진 가와카미 있죠? 그녀가 학교에 나오지 않자 아이들은 괴담을 하나 만들어 내요. 그녀의 이름이 나오는, 그저 이름만이 나오는 한 공포 책을 선정해 '그 책을 다 읽으면 저주를 받는다'라는 소문을 내고 다니기 시작한거예요.

한 거들먹거리는 친구가 신에게 찾아왔어요. 도서관에서 랜덤으로 책 세 권을 뽑았는데 한 권에는 내 이름이, 나머지 책들에는 조심하라는 둥의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고 네 지혜를 좀 빌려달라면서 말이죠.

누가 그런걸까요? 전말은 이래요. 사토하라는 친구인 가와카미가 사라졌는데 그런 괴담을 만들어 웃고 떠드는 친구들이 싫었어요. 그래서 그 친구에게 일명 본때를 보여준거예요.

이 4부에서는 사토하라가 범인이었던만큼 탐정 역할을 맡은 미즈타니에게 모든 것을 다 말하지는 않는데요. 그럼으로 인해 미즈타니가 문제를 다 풀고나서 서운하다, 배신감을 느꼈다는 감정을 토로하는 게 뭇 초등학생의 감정 싸움을 보는 것 같아 저는 마냥 귀엽고 흐뭇했습니다. 이 때쯤 되니 참으로 순수한 소설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에필로그 : 봄방학의 정답 공개



전학간 이다라는 이름의 친구가 찾아와요. 네 살 배기 동생이 없어졌다면서요. 동생은 평소에 '미아가 되면 집으로 돌아와라' 라는 말을 기억하고 호텔에 가 있었는데, 그 이유가 왜냐하면... 가족이 이사 중에 호텔에 잠시 머물렀었거든요. 네 살 배기 아기의 눈에는 호텔이 이사간 집인 줄 알았던거예요. 참으로 귀여운 이야기죠.






사실 책장을 덮고 조금 심난했어요. 신이 신같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들더군요. 내가 너무 찌들어서, 그들의 섬세하고 복잡다단한 감정선을 눈치채지 못했거나 알면서도 귀찮아서 지나친 건 아닐까... 하고요. 분명 초등학생의 하루하루에서 반짝거리는 무언가를 얻어갈 수 있었을텐데. 저는 실패한 것 같아요.

그런 생각도 듭니다. 이 책을 진지하게 읽고, 마음 깊이 느끼는 바가 있는 사람을 만나보고 싶어요. 그리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좀 들어보고 싶네요.

초등학생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냐, 는 질문에는 반반이에요. 추리소설다운 시원한 맛을 느끼지 못할 것 같고, 조금 밍숭맹숭해서요. 제 기준엔 너어무 순수하다고나 할까요? 잔인한 탐정소설을 읽기 어려워 하시는 분들, 입문용으로 맛보기 소설이 필요하시다면 이 책을 추천드려 볼게요. 상당히 순한 맛입니다. 그럼 오늘의 리뷰는 여기서 마칠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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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라기 게이치, 그는 사형수입니다. 한 아내와 남편 그리고 두 살배기 아기를 무참히 짓밟았단 이유로 현장에서 체포되었어요. 그리고 그 끔찍한 현장에서 살아남은 이가 한 명 있었는데요. 이름은 이오 요시코, 아기의 할머니였습니다. 그녀는 조발성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었지요.

가부라기 게이치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볼게요. 그는... 탈옥을 합니다. 그래서 그의 목에 어마어마한 현상금이 걸려요. 잘못된 제보로 인해 수사가 오히려 진척되지 않을 정도로요. 그는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고 있는걸까요? 왜 잡히지 않는거죠?

그는 수염, 점 위치, 헤어스타일 등을 교묘하게 바꿔 원래의 인상을 탈피하고 왼손잡이라는 생활습관도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매사에 조심을 했습니다. 무려 직업을 갖기도 하고요. 연애감정을 품기도 했어요. 우습죠? 탈옥한 사형수가 지가 뭔데, 남의 인생은 짓밟아놓고?

개호사, 공사 현장 작업원, 여관 직원, 재택 기자 등 그는 다양한 직종에서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주인공 가부라기 게이치의 입장에서 설명이 되지 않아요. 그를 만난 사람들이 그에 대해 이야기 하는 걸로 엮여져 있습니다. 감히 그에게 발언권도 주지 않겠다는 저자의 의도였을까요? 객관적인 의도에서 바라봐달라는 뜻이었을까요?

조금 의아하게도요. 그를 만나 겪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바보 아니야? 아무리 소설이라도 그런 흉악한 범죄자가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아?' 라고 생각하실 수 있겠어요. 저도 그랬거든요.

개인적으로 저는 준지라는 사람을 만났을 때 제 마음에 진심으로 의문이 드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 혹시 진범 아닌 거 아니야?'




라고요. 사실 읽다보면 이러한 종류의 소설을 많이 읽은 사람은 금방 눈치 챕니다. 제목의 '정체'의 '정체'도 알게 되지요. 그래서 반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읽었어요. 그런데... 반전은 없더군요. 여기서부터 스포주의 입니다.

가부라기 게이치는 정말 범인이 아니었어요. 사건이 일어났던 날 당시로 함께 거슬러 올라가 볼게요.

그는, 18살이었던 그는, 길을 걷다가 웬 남자와 마주치게 되는데요. 낯선 사람을 보고 씨익 웃고 지나가던 그 사람, 스프링처럼 튀면서 앞으로 나아가던 그 사람, 가부라기 게이치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죗값을 치르지 않은 그 사람을 그는 매우 이상하게 생각했어야 했어요. 곧이어 들리던 여자의 비명소리와 그를 연관지어 생각했어야 했고요.

소리가 난 곳으로 들어가보니 그 곳엔 한 아내와 남편 그리고 두 살배기 아기가 처참한 모습으로 피칠갑을 하고 누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놀랍게도 숨이 붙어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어요. 바로 아기의 할머니였죠. 그녀는 아들의 숨이 아직 붙어있다는 걸 확인하고 몸에 있는 칼을 빼내려고 했습니다. 그럼 더 출혈이 심해지기 때문에 그는 그녀를 말렸고요. 그리고, 그럼으로 인해 그의 얼굴과 몸에는 피해자들의 피가, 칼에는 지문이 묻게 된 점이 매우 애석하고도 안타까운 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현장에 도착한 경찰은 상황을 보자마자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를 당장 체포해요. 황당한가요? 할머니는 진범의 얼굴을 보았고, 진위여부를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그녀에게 증언을 부탁하면 되겠다고요?

그녀는요, 조발성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었는데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는거예요. 그녀가 경찰에게 남긴 말은 단 하나. '진범은 검은 옷을 입었고...' 그렇게 가부라기 게이치는 구치소에 수감이 됩니다.


너무 억울하잖아요. 그래서 탈옥한거예요. 내가 한 짓이 아닌데, 어마어마한 죗값을 내가 치르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아무리 상황이 그렇다해도, 수사를 하다보면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지는 거 아닌가요?

몇 년 전 화성연쇄사건의 진범이 옛날에 자신이 한 짓을 토로하면서 억울하게 수감되어 있던 피해자가 몇 십년 만에 풀려나는 희대의 가슴 아픈 사건이 있었지요. 그는 왜 진범이 아니었는데도 죄를 뒤집어 쓰고 복역을 했던걸까요?


누가 뒤집어 씌운걸까요?




가부라기 게이치의 변호사는 죄를 인정해서 감형을 꾀하자는 제안을 하고, 여론은 미친듯이 뜨겁기만 합니다. 보호시설에서 생활을 하고 있던 그는 아무도 편이 되어주지 않았어요. 유일한 목격자인 할머니마저 경찰의 등쌀에 밀려 그를 진범으로 지목하게 됐고요.

그가 탈옥을 하고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고 했잖습니까? 그 중엔 개호사도 있었는데요. 개호시설에서 일을 하게 돼요. 그 시설에는... 이오 요시코가 있었습니다. 할머니요. 유일한 목격자. 가부라기 게이치가 일부러 노리고 들어간거죠.


왜? 복수 하려고?




아뇨. 제발 기억을 떠올려달라고, 매일밤 그녀의 손을 붙들고 간청과 더불어 도움을 주려는 노력을 합니다. 물론 자신의 정체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가면 뒤에 철저히 가린채로요. 그녀는 그 당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너무 괴롭다며 그의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마지막 화자, (에피소드마다 화자가 달라집니다.) 마이라는 여자의 입을 통해 전해져요. 그녀는 그를 좋아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그가 탈옥수와 비슷한 점이 너무 많다는 걸 눈치 채곤 관리자에게 이야기 한 후 경찰이 오게 만들죠. 가부라기 게이치는 패닉상태가 되어 마이를 인질로 잡고 자기 이야기를 좀 들어달라고 절규에 가까운 부탁을 합니다.

슬프게도 그는... 그 자리에서 죽어요. 경찰이 쏜 총에 맞아서요.





이 책의 리뷰를 보면 대다수가 '마음이 아프다' 라고 말씀들을 하세요. 저 또한 그랬습니다. 비단 소설일 뿐이지만, 몇 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비슷한 일로 억울한 옥중생활을 하신 분의 이야기가 전파를 탔었잖아요. 그 분이 생각나 마음이 아프더군요.

언젠가 한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이춘재의 죄를 뒤집어쓰고 복역을 한 피해자가 그 당시를 떠올리면 어떻냐는 질문에 구토를 하러 갔다고요. 몇 십 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그 때를 떠올리기만 하는 것으로도 신체적으로 강한 거부 반응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그 당시에, 피해자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는 소설 속에서도 나오지 않습니다.





무고죄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들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의 인권을 법이라는 잣대로 마음대로 조이고 끊는 제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어요. 무거운 주제이므로 일단은 각성하는 상태에서 마무리를 지었지만요. 이 책, '정체'를 통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데 의의를 둡니다.

책이 상당히 두껍습니다. 하지만 흡인력 있는 저자의 글재주로 책장은 휘리릭 넘어가요. (가끔 번역에 오탈이 발견되어 멈칫하는 순간이 여러 번 있긴 했었습니다만) 저는 무고죄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분께 이 책을 추천 드리고 싶습니다. 재미로 읽기를 원하시는 분께는 '고구마 결말'이니 마음의 각오 단단히 하시라는 말씀 드리고 싶고요.

이 작가는 이 책으로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인사를 건넸다고 합니다. 나중에 서점에서 그의 이름을 보았을 때, 외면하고 싶지는 않은 첫 만남이었어요. 여러분은 어떠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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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스포주의)



여기 교육열이 어마무시한 엄마가 계십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들, 쌍둥이를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데요. 어느 날 갑자기 두 아들 중 한 명인 건휘가 스스로 세상과 작별을 고해요. 왜? 영재 소리 듣는, 엄마 말 잘 듣는 착한 아들이 대체 왜?

혼자 남은 아들 선휘는 엄마를 더 미워하게 돼요. 선휘는 형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 누구보다 이유를 잘 알았거든요. 그는 형처럼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다가 나중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건강하게 자신의 감정을 다 표출했죠.

다행히도 선휘의 절규 앞에 엄마는 정신을 차려요. 평생 자신의 신념이 옳은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녀이기에 내려놓기란 아마 쉽지 않았을겁니다. 그런 엄마를 선휘는 이제 용서할 수 있을까요? 그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혼란의 와중에 은빈이라는 친구를 만나 겪게되는 감정선 이야기는 꽤 흐뭇합니다. 건전하고 바람직한 이성관계란 이런 것이다 란 생각이 들더군요.

 

엄마와 아빠



 

집에 티비가 없음은 물론이고 거실의 벽은 책이 빼곡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집에서 쌍둥이들은 오로지 1등을 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요. 엄마를 위해서.

아빠는 바쁘다는 핑계로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아요. 그러던 어느 날 선휘는 목격해요. 정처없이 광장을 배회하는 아빠의 모습을. 엄마의 아이들을 향한 도가 지나친 간섭에도 이렇다할 발언을 하지 못하는 아버지. 엄마로부터 아이들을 지켜줄 힘이 없는 무능력한 아버지. 쌍둥이는 세상에서 가장 편한 곳이어야 하는 집이 지옥 같았을겁니다. (대종이모라는 분이 아이들을 위로 해주었다고 하지만, 엄마와의 대립으로 결국 그녀 또한 집을 나가요.)

한 명이 애를 잡으면 한 명은 말리기라도 해야 하는데 이 집은 아무도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었어요.

그리고 엄마의 공부를 시키는 방법은 참으로 올바르지 못합니다. 1등을 하라고만 가르치기 때문이죠. 그리고 혹여나 성적이 떨어지면 가차없이 매를 들었습니다.


선휘 엄마와 스카이캐슬의 예서 엄마



 

책을 읽으며 문득 스카이캐슬의 예서 엄마가 생각났습니다. 그녀 또한 딸의 의대 진학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선휘 엄마와 예서 엄마, 이 둘에게는 차이점이 하나 있었어요.

예서 엄마는 그래도 아이의 감정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예서가 친구들과 팀을 짜서 공부를 해야 할 때 그 안에 혜나가 있는 걸 알고 엄마에게 짜증을 부리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엄마는 거기에 대고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말을 하지 않아요. 딸이 오죽하면 저럴까 싶어 그 팀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차라리 자신이 다른 학원들을 더 알아보기 시작하죠.

예서가 좋아하는 우주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있었을 때도, 딸이 혼란스러워 하자 엄마는 진실을 폭로하려면 이제까지 해온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데,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할 수 있겠느냐며 울면서도 딸의 의견을 물어요. 모녀는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열심히 살아왔던터라 그간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기란...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밤새 고민해봤는데, 우리 딸 잘 먹고 잘 자고 마음 편한 게 제일일 것 같다.




그녀는 내가 코디만 쓰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거라고, 엄마가 정말 미안하다고, 너를 너무 사랑한다고 딸을 꼭 끌어안으며 울어요. 생각해보면 예서 엄마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미움을 사는 인물이었지만, 자식에게만은 일관되게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에비해 선휘 엄마는 어떤가요? 건휘가 농구를 하다 한 아이의 목을 조르는 일이 있었어요. 그 아이는 곧바로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는데요. 소식을 들은 선휘 엄마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건휘가 선휘보다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선휘에게 가서 형이 한 걸 네가 한 짓이라고 말해줄 수 없겠느냐는 충격적인 말을 해요.

물론 한낱 이야기에 불과하기 때문에 실로 진지해질 필요가 없다는 건 저도 압니다만, 선휘 엄마의 공감 능력이 결여된 모습에 주목할 필요는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말을 들으면 선휘 그리고 건휘가 어떤 감정을 느낄까요? 선휘 뿐 아니라 건휘도 혼란스러웠을겁니다. 엄마가, 어른이, 아니 애도 장난으로라도 이런 말은 안 해요. 절대 하면 안 되는 말이잖아요.

그렇게 아이들의 정서를 파괴하면서까지 엄마가 지키고 싶었던 건 '1등'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1등'을 지키고 반드시 명문대에 진학을 시켜야만 했어요.

예서 엄마와 선휘 엄마의 공통점은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다는 것. '왜 저렇게 극성일까?' 하지만 둘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아이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할 때, 내 생각을 존중했느냐 아이의 생각을 존중했느냐. 거기서 갈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평상시 아이의 자존감, 자신감에 관심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하는 것도요.

예서는 한바탕 소란을 겪고 다음해 수능을 준비하게 되는데요. 자신이 직접 짠 자기주도 학습 계획표를 엄마에게 보여주며 씨익 웃죠. 그에반해 선휘는 엄마가 잘못했다고 하는 뉘우침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잘못을 용서하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말을 남기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의 감정을 존중해야겠습니다. 성적은 다시 올리면 되는데, 애착손상은 다시 회복 시키기가 아주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내게 취미와 특기라는 게 있었나? 취미와 특기도 어쩌면 학교 수행평가를 잘 받기 위해 급조된 것이었다. "나에 관해서 아는 게 그렇게 없어? 생각 좀 하고 살아라, 짜식아!" 선생님들은 이렇게 다그쳤다. 나에 대해 생각하고 느낄 틈을 공부에 빼앗긴 아이들을 무뇌아 취급했다.


아침 일찍 학교 갔다가 학원까지 마치고 집에 오면 늦은 밤인데 취미 특기 만들 시간이 어딨어요. 공부가 취미라고 말해야 할 것 같은 환경을 만들어놓고 '너는 너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느니... 웃겨요.

저 학교 다닐 땐 방과 후 활동이 활발하지 않은 편이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어요. 다양한 흥밋거리를 접하고 배울 수 있게 학생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장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취미 특기 못 찾으면 어때 스트레스라도 풀고 가라는 의미에서라도요.

개들은 움직여야 했다. 이대로 살이 더 찐다면 아마 영원히 걷지 못할 수도 있다.


선휘와 은빈이 길을 걷다 목줄이 짧게 매인 개를 발견해요. 채소 과일을 파는 아저씨가 늘 곁에 묶어두는 개였죠. 그들은 개가 너무 불쌍했어요. 그래서 한 명이 망을 보는 사이 한 명이 줄을 끊어 개를 구해줍니다.

그리고 개의 목에 연고를 발라주어요. 그 개는 몹시 뚱뚱한 개였는데요. 운동을 전혀 하지 않아 배가 땅에 닿을 정도였어요. 개는 뛰어다녀야 하는데... 아저씨가 너무하단 생각에 그들이 벌인 꽤 과감한 일탈 행동이었죠.

하지만 곧 경찰에 붙잡혀요. 개 주인 아저씨에게 혼이 나고요. 물론 선휘의 엄마에게도 호되게 혼이 납니다. 선휘 엄마는 역시 개는 안중에도 없지만...

선휘는 그래도 설명했어요. 엄마가 이해할 수 있을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목이 짧게 줄에 매여 갑갑해보였다,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 하는 개가 너무 가여웠다, 개는 뛰어다녀야 한다... 그래도 여전히 엄마는 '어떻게 내 아들이 이런 일을!' 에만 포커스가 맞춰져 있네요.

개는 달려야 해요. 이대로 살이 더 찌면 영영 달리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리고 사람은 자유가 있어야 해요. 자유를 억압 받으면 세상으로 달려나가야 할 시기에 나가고 싶어도 발이 땅에 못박힌 것처럼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할 수도 있어요.

나쁜 엄마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늘 불안하고 근심 걱정을 달고 살지. 언제나 망상이 먼저 발동하고 결국 아이 뜻을 꺾고 지배자가 되려고 해. 어쩌면 엄마는 감정이 마비되어 있는지도 몰라. 그러니까 내 감정을 읽지 못 하지. 누가 엄마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당사자인 아이의 기분이 어떠한가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아이가 지친다는 신호를 보내올 때 누구보다 빨리 알아채주는 엄마가 되고 싶어요. 남들이 다 가지 않는 길이라 할지라도 아이가 가고 싶어하면 기꺼이 아이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누가 엄마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러게. 누가 우리를 이렇게 조급하게 만들었을까?

엄마는 단 한 번도 내 말에 귀 기울여 준 적이 없는 사람이다. 내가 행복하길 바라기보다는 나 때문에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이다.


육아가 참 어려워요. 우리는 인생을 먼저 살아봐서 어떤 길이 덜 힘들고 더 빠른 길인지 대충 알잖아요. 사랑하는 아이에게 지름길을 알려주고, 나름의 비법을 전수해주고 싶은건데... 아이는 꼭 제 몸으로 부딪혀 생채기를 낸 다음 경험치를 얻고 싶어하죠. 내 의도와는 달리 나를 오해할 수도 있고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얘... 내가 낳았어도 내 소유물은 아니잖아요. 실패할 권리, 상처받을 권리 있잖아요. 내겐 아이를 따뜻하게 안아줄 권한만이 있을 뿐이고. 내 생각이 맞음이 틀림없어도 가끔은 뒤로 물러나 줄줄도 알아야 하는 것 같아요. (그래, 방황해라! 그러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눈을 떴을 때 현기증을 느끼며 보는 세상, 거기서부터 시작이라고 오소희 작가님이 그랬다.) 내 욕심을 앞세워 가로막지 말아야지.

아이에게 분칠을 시켜 예쁘게 포장한 다음 무대 위에 올려놓고 내가 박수갈채를 받는 세상에서 가장 못난 엄마만은 절대 되지 않으리라고 새삼 또 다짐해봅니다.





선휘의 엄마가 변한 결정적인 계기는 선휘가 베란다 밑으로 떨어지려 할 때였어요. 하마터면 큰일날 뻔 했지요.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두 아들을 모두 잃을 뻔 했어요. 그 일이 있은 이후 엄마는 병원에 입원해 심리치료를 받아요. 선휘는 학교를 그만두고 사막으로 여행을 떠나고요.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아이가 꿈을 갖도록 환경을 조성해주고 꿈이 생겼다면 도와주고 지지해주는 게 부모의 역할인 것 같아요. 1등을 해야 한다고, 전교회장에 나가 스펙을 한 줄이라도 더 늘려야 한다고 잔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요.

이 책은 다소 과장된 면이 없지않아 있습니다. 모든 엄마들이 선휘 엄마같지는 않을거예요. (그녀는 정신증을 앓고있는 것처럼 보였...) 선휘 엄마보다는 그로인해 힘들어하는 쌍둥이에 초점을 맞춰 읽으시면 더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픽션이지만 안타까운 이야기였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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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특이하죠. 저 사실 며칠 째 고민했거든요. 왜 '투명 카멜레온'인지. 책을 덮은 지는 오래됐는데 제목이 이해가 안 되서 리뷰를 쓰지 못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리뷰를 다 쓰고 나니 이건 그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용부터 감상에 이르기까지, 제 리뷰 한 번 읽어봐주실래요?


 

if




바 이름입니다. 라디오 디제이를 맡고 있는 기리하타, 예쁘장한 임산부 모모카, 무섭게 생긴 이시노자카, 반반하게 생긴 레이카, 바 사장 데루미, 늘 불상을 깎는 70세 노인 시게마쓰가 늘 이 곳에 모여요. 어느 날 비를 쫄딱 맞은 웬 여인이 이상한 말을 늘어놓고 가죠. 그 다음날 또 찾아와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뚝딱거리는 모습을 보이고요.

그 여인의 이름은 미카지 케이입니다. 그녀는 기리하타의 라디오를 듣는 팬이에요. 하지만 라디오는 얼굴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목소리만큼이나 그가 얼굴도 잘생겼을 줄 착각하고 있었어요. 기리하타는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반반하게 생긴 레이카를 앞세워 케이를 속여넘겨요.

하지만 그 계획은 얼마 못 가 들통나고 맙니다. 케이는 흥분하여 바에 모여있던 사람들을 파렴치한 사람들로 몰아가요. 그 중에서도 선두에 서 그녀를 속인 기리하타, 그는 그녀에게 거의 약점이 잡혀버리고 마는데요.

그녀는 그에게 시키는대로 하라고 해요. 그리고 어느 날 이시노자카씨를 데리고 묘지로 오라고 합니다.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않고 한 명에겐 쫓기는 역, 한 명에겐 쫓는 역할을 부여하는데,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추격전을 한바탕 벌이고... 그 후에도 설명은 해주지 않습니다!

+) 왜 부탁을 들어주느냐고요? 기리하타가 케이가 마음에 들었다네요. 일전에 케이 앞에선 디제이가 아닌 척, 전화로는 디제이인 척을 하며 그녀를 속여왔어요. 그 광경을 그녀가 목격했고요. 미안하고 민망한 마음에 사람들에게 협조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다닌거죠.


 

하숙? 동거?




어느 날 케이는 갈 곳이 없다며 기리하타 집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들어와요. 아, 그런데 불행 중 다행이랄지 민폐를 부리는 타입은 아니네요.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지냅니다.

하지만 함께 살다보니 진지한 얘기를 하게 되는 순간이 있었어요. 케이는 자신의 아버지가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불법 폐기처리를 하는 사람 때문에 망하게 돼 길가에 나앉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고 털어놔요. 그래서 그 불법 폐기처리자 즉, 고토라고 하는 사람을 겁주기 위해 여러가지 꾀를 내기 시작한거라고 설명합니다. 그녀가 안쓰러웠던 기리하타는 앞으로도 그녀를 도와주기로 마음 먹어요.


 

콘크리트 벽돌 투하 작전 / 미행 작전 / 독이 든 소라 요리와 새총 작전




<콘크리트 벽돌 투하 작전>은 미카지 케이 혼자 벌인 일입니다. if 건물 위에서 아래에 있는 목표물을 향해 벽돌을 떨어뜨렸어요. 다행히 죽진 않았지만요.

그 다음은 <미행 작전>. 이 때부터는 기리하타가 함께 해요. 고토가 '저번부터 누가 내 목숨을 노리고 있어. 근데 그게 누굴까?' 싶은 시점에 벌인 작전. 쫓기는 역할을 맡게 된 기리하타는 고토가 망하게 만든 회사의 로고가 찍힌 점퍼를 입고 있었어요. (케이가 줌) 고토는 그래서 눈에 불을 켜고 쫓아왔던 거였고요.

마지막 <독이 든 소라 요리와 새총 작전>은 if의 식구들이 함께 합니다. 종업원인 척 고토의 방에 들어가 독이 든 소라 요리를 먹인다는 계획이었죠. 그 정도의 독은 먹어도 생명에 지장이 없을 정도였지만, 케이가 원한 건 '누군가 너를 노리고 있다. 인생 똑바로 살아라!' 였기 때문에 아쉬울 건 없었어요.


 

케이의 취직, 사라짐




케이는 if에 취직해요. 어느 날 데루미 사장이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홀로 밖에 나와있던 케이가 누군가에게 급히 끌려나갑니다. 소식을 들은 if 식구들은 케이가 있을만한 곳을 찾아가죠.

산 속에 들어간 if 식구들, 그들은 큰 구덩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건 바로 불법 폐기물을 버릴 수 있는 공간. 정당한 방법으로 쓰레기를 버리려면 비용이 많이 드니까 얌체같은 사람들이 돈을 받은 뒤, 산의 적당한 곳에 커다란 구멍을 파 그 안에 폐기물들을 쏟아붓고 흙으로 덮고 있었어요. 그렇게 벌인 짓을 들키면 폐기업체와 그 쓰레기를 버린 회사는 처분을 받게 되는데 회사가 더 가혹한 처분을 받고, 폐기업체는 이름만 바꿔 또 똑같은 짓을 저지르곤 했죠. 그렇게 도산한 케이 아버지의 복수를 지금 케이가 하고 있는거고요.

if 식구들은 케이가 이 곳으로 끌려갔다고 생각했고 예상과 같이 그 곳에서 케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옆에는 케이의 아버지도 함께 있었어요. 기리하타에게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말했었거든요. 기리하타는 그녀 말의 모순점을 하나하나 풀기 시작해요. 그리고 알아내요.

 

단지 고토와 관계된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믿음만 심어주면 되었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고토에게 복수하겠다는 결심을 포기하기를 바랐다.


케이는 자신의 아버지가 고토에게 복수할 것이 두려워, 고토가 두려워 그들을 말릴 생각으로 그간의 짓들을 저질렀던 것이었어요.
아버지는 고토에게 한 방 먹이려고 이 자리에 나와 있었고, 케이는 말리고 싶었어요.

결국 아버지는 고토를 때리고 말았죠. 그에게는 험상궂은 일행이 있었는데.


 

추격전, 아침




케이와 케이 아버지, 그리고 if의 식구들은 한 밤의 추격전을 벌입니다. 트럭으로 퇴로를 막아버린 고토의 일당과 맞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맘 졸이는 새벽을 보내요. 그 때 기리하타가 나섭니다. "네가 잘못했잖아! 어째서 그렇게 뻔뻔한거야!"

...라고 말하고 싶었겠죠? 소심한 그는 버벅거려요. 하지만 마침내 쏟아내죠. 너 때문에 한 회사가 망했다고! 한 가족이 길에 나앉았다고!

하지만 고토는 끝까지 철면피에요. if 식구들은 이제 저마다의 개인기로 고토를 공격합니다. 험상궂게 생긴 이시노자카의 협박, 새총 작전을 성공하기 위해 연습했던 실력을 뽐내는 시게마쓰, 아! 임산부 모모카는 몸을 조심해야 해서 길이 있을 거라며 먼저 돌려보냈는데요. 내려가는 길에 그녀가 경찰 사이렌을 울려요. "어? 이거 이런 소리도 나네?" 태연히 돌아오면서. 고토는 꼬리에 불이 붙은 뭐 마냥 줄행랑 쳤지요.


 

if 식구들이 기리하타를 따라온 이유




아침이 돼요. 기리하타가 고백합니다. 이제까지 내가 라디오에서 각색한 우리 if 식구들의 이야기는 모두 결말이 조금씩 다르다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거나 매일같이 떠오르는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들이었죠. 기리하타는 그들에게 미래를 선물해주기 위해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은 선택 가능한 것 아니냐며 그들을 위로해왔습니다. 그래서 과거를 덜 무겁게 소재화 하여 라디오에 그들의 사연을 띄웠었어요. 그 때 이후로 if 식구들이 서서히 웃기 시작했다고 해요. 이게 바로 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기리하타를 따라 산까지 올라온 이유에요.

기리하타는 얼마 전 출산한 여동생과 엄마가 계시다고 했었는데,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려요. 그들은 교통사고로 모두 죽었어요. 그는 충격에 휩싸여서 몸이 굳었는데 눈물은 나오지 않는, 울고 싶은데 눈물이 나오지 않는 그런 상태에까지 이르러요. 그런 그가 사람들을 위로한거예요.


 

투명 카멜레온




기리하타가 어릴 때 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다른 친구들과 부모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살았었대요. 하루는 그가 자기 집에 카멜레온이 산다며 기리하타를 초대한거예요. 하지만 카멜레온은 보이지 않았죠. 하지만 친구는 정말 카멜레온이 있는 것처럼 행동 했어요.

그리고 집에 돌아온 기리하타도 자신의 집에 투명 카멜레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요. 무엇인가가 없어지면 '투명 카멜레온이 가져갔구나!', 물건의 위치가 달라져있으면 '투명 카멜레온의 짓이로구나!' 뭐 이런 식으로.

나이가 들수록 그 생각은 점점 희미해져 어느새 잊어버리게 되지만요. 그 때 그 기억을 다 커서 다시 한 번 회상하게 돼요. 왜 그 기억을 떠올린걸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 남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내 눈에는 보이는 내 상처와 비슷하단 생각이 들어서였을까요?





책을 다 읽고나서 한동안 멍했어요. 바로 머릿 속을 관통하는 하나의 생각이 없었어서요. 하지만 아래의 글을 읽고나니 서서히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 들더군요.

 

모두 아직 상처가 완전히 낫지 않았다. 때때로 옆얼굴에 다른 사람 같은 표정이 맺힐 때도 있다. 기억은 언제나 사람을 따라다닌다.


누구에게나 투명 카멜레온이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 사람만이 볼 수 있는 그 사람만의, 혹은 나만의 투명 카멜레온. 그건 다른 사람이 봤을 때 없는 것이어서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그 사실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건 분명히 존재하고, 내게 영향을 끼치는 것. 등장한 모든 인물에게 투명 카멜레온이 있었어요. 투명 카멜레온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건 '기억'이나 '상처'라고 다시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작가는 이 작품을 쓰기 전까지 자신을 위한 글을 썼다고 해요. 어차피 모두를 만족시킬 글을 쓸 수는 없으니 그럼 내가 좋아하는 만족스러운 글을 쓰자 하면서요. 그런데 이 작품, <투명 카멜레온>은 독자들을 위해 썼다고 합니다. 즉,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히 있다는거죠.

기리하타가 전하는 메시지를 당신은 어떻게 받아보셨나요? 저는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책에서는 소중한 사람을 잃고 웃는 사람, 그럼에도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사람이 나와요.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겠죠. 내 카멜레온도 가엽지만, 다른 사람들도 가여워한 시간이었어요.

 

 

[책] 미치오슈스케 -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 모든 진상의 키워드는 인간의 주관

인간은 외롭거나 슬퍼서 견딜 수 없을 때,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게 그 감정을 배출한다. 약자는 그 배출구로 희생된다. 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괴로울 때 자신이 만든 세계로 도망쳐 들어간다.

hyunaver.tistory.com

미치오슈스케의 다른 책 리뷰입니다. 이 책을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혹은, 흥미가 생기셨다면 저자의 다른 책도 한 번 구경해보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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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리가 37살 때 산부인과 진단을 받았는데 난소나이 41살이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해요. 그리고 2년 후, 재진단을 받았을 땐 47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요. 이대로는 영영 임신을 할 수 없을까봐 무서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난자 채취를 하기로 마음 먹는데요.

한국에서는 정자 기증이 불가능해요. 그래서 일본에서 다시 한 번 난자 채취를 하고 임신 준비에 들어가게 됩니다. 한국에 있는 자신의 얼린 난자는 아기를 갖고 싶지만 생기지 않는 부부들이 자신에게 줄 수 없겠냐고, 그런 요청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그 사연이 모두 절절해서 안타깝고 슬픈 마음이 들더라고요.

 

정자 기증을 받는다고 할 때 우리 부모님은 어떤 태도를 취하실까요?

 



사유리의 부모님은 그녀를 존중하는 분들이셨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았어요. 어떤 선택이든 딸의 의견을 존중하고, 책임을 지도록 도와주는 분들이셨죠. 그런 분들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사유리의 자존감이 이토록 높은 것에도 수긍이 갔습니다.

"엄마, 나 지금 당장 아이를 낳아야겠어. 정자를 기증받아서." "그래, 그럼 엄마가 병원 알아볼게." 이게 우리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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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사유리가 정자를 기증받아서 임신을 했어." "사유리만 안 죽으면 돼. 사유리만 죽지 않으면 난 상관없어." 이게 우리 아빠다.


제 입장이라고 생각을 하면 말문이 턱 막혀요. 저도 사유리 부모님과 같은 교육관으로 아이를 키우려 노력하고 있지만, '그래, 그럼 엄마가 병원 알아볼게.' 와 같은 말은 선뜻 나오지 못할 것 같아서요. 그리고 어떠한 선택이든 내가 하고, 책임도 내가 지는 인생... 아이가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돕고 싶은 한편, 살아도 보고 싶더라고요. 이렇게까지 자식을 지지하고 믿어주는 부모를 둔 사유리가 놀랍도록 부러웠어요.

일본에서 난자 채취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난자 채취는 여러 개의 난포가 성장하도록 미리 배란 유도제를 맞고, 배란이 되면 마취를 한 후 난소에 주삿바늘을 넣어 난자와 난포액을 뽑아내는 단계를 거친다. 이렇게 채취한 난자와 기증받은 정자로 시험관 수정과 배아(수정란) 자궁 이식을 시도한다. 착상에 실패하면 매달 이 과정을 반복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약을 먹어야 하는,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힘들고 지난한 과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신을 위해 드디어 무언가 하고 있다는 데 깊은 안도감이 들었다. 그 감각이 큰 위로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몸도 마음도 매우 지친다고 하는데 난임으로 고생하는 다른 예비 부모들의 고생이 눈에 보이는 듯해 맘이 안 좋았어요. 이런 과정을 겪고 마침내 얻은 아기는 그들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아기

 



결혼을 하고 아기를 갖게 되면 태어날 아기의 얼굴을 대충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유리는 기증자의 얼굴을 모르기 때문에 추측이 어려웠어요. 그래도 태어날 아기의 성격은 상상 해볼 수 있었는데 그 이유가 기증자의 성격 및 IQ, EQ를 알고 선택했기 때문이었어요. 사유리는 태어날 아기가 이런 점은 갖고 있었으면... 하고 바랐어요.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좋아하는 기증자는 제외했다. 이미 내 쪽에 유전 질환을 앓고 있는 부계 친척이 있어서 유전되는 질병이 없는 정자를 받아야 했다. 더불어 정서가 안정되고 감정이 풍부한 사람으로 자랐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EQ가 높은 기증자의 정자를 선택했다. 그 기증자가 운동을 좋아하고 차분하며 끈기 있는 성격이라고 해서 더 호감이 갔다. 나는 항상 내게 끈기가 부족하다고 느껴왔는데, 나와 다른 성격을 가진 기증자의 정자가 내 쪽의 모자란 면을 채워주길 바랐다. IQ는 내게 크게 중요한 요인이 아니었다.


나중에 이런 말도 나와요. 사유리가 어릴 때 친구에게 들은 모진 말에 상처를 받아 울면서 엄마에게 토로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그 때 사유리의 엄마가 "그럼 나도 바보네! 아이스크림 먹을까?" 하며 유쾌하게 넘어가셨대요.

사유리는 엄마에게 삶을 농담처럼 대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하는데요. 훗날 젠(사유리의 아들 이름)이 밖에서 남에게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자신도 엄마처럼 행동할거라고 했어요. 행복과 불행은 내가 정하는거지 남이 정할 수 있는게 아니에요!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는 남들의 시선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 주변에서 아무리 나를 칭찬해도 스스로를 돌아봤을 때 부끄러운 일이 있다면 오히려 상처를 받는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내 감정의 기준이 나에게 있으면 타인의 말이나 시선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젠이 나의 이런 성격을 닮으면 좋겠다. 젠을 둘러싼 모든 사람이 젠을 불쌍하다고 해도 젠 스스로가 행복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세상 모두가 젠에게 행복해 보인다고 해도 젠이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내 마음은 찢어질 것이다.


사유리가 얼마나 자존감이 높은지 알 수 있는 대목이죠. 그리고 뒤이어 젠이 행복한지 불쌍한지는 오직 젠만이 결정할 수 있다고 덧붙였는데 공감해요. 무슨 일이 있을 때 가장 중요한 건 내가 내 목소리를 듣는 것이에요. 이건 애엄마인 제게도 적용 가능한 말인 것 같아요. 사유리는 참 생각이 깊고 배울점이 많아요.



임신 소식을 알릴 현명한 방법

 



이런 사유리에게도 당연히 고민은 있어요. 다른 사람들과 다른 방법으로 임신을 했기 때문에 연예인인 그녀는 생각이 많았어요. 심지어 만삭 때까지 출연 하고 있던 프로그램에는 펑퍼짐한 옷으로 체형 커버를 하고 다니며 아무에게도 얘기를 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지인들에게도.

아기를 출산하고 이제 이 사실을 어떻게 알릴지에 대해 처음에는 거짓말을 하려고 했다고 해요. 하지만 아기에게 '거짓말은 하면 안 된다'고 가르치고 싶은데, 부모인 자신이 거짓말을 하면 안되잖아요? 결국 모든 일을 사실대로 털어놓기로 결심해요.

일례가 없는 일이기 때문에 이제 다시는 방송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르고, 어마어마한 욕을 먹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시뮬레이션을 돌려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중의 반응은 예상과는 정반대의 것이었어요. 비혼 출산을 응원하는 사람들부터 용기 있는 그녀의 선택에 힘을 보태주는 사람들까지. 물론 정상적이지 않은 선택이라며 비난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응원을 해주는 사람들이 압도적이었다고 해요.

'슈퍼맨이 돌아왔다' 라는 주말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로 결정이 났을 때, 비혼 출산은 가족의 해체를 의미하며 결국은 동성혼을 부추긴다는 식의 시위가 있기도 했다는데요. 프로그램 제작진은 '기획의도에서 벗어났다고 하지만 기획의도라는 게 영원불멸은 아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상황도 변화하는데 그런 변화를 담고자 한다'고, '사회는 하나의 형태로 고정이 안된다'고 말했어요. 무척 공감가는 말이에요. 슈돌은 다양한 가정의 모습을 담담히 보여줄 뿐 무조건 생기발랄하고 재미있는 가정의 모습을 보여주지만은 않죠. 그렇게 사유리와 젠은 전파를 탔어요.



사유리가 비혼 출산을 추천하지 않는 이유

 



소식을 접했을 때 저도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 느낌이 오래가진 못 했어요. 그닥 긴 여운을 남기진 못 했다고요. 왜 그랬을까요. 사유리는 제게 '외국인' 그리고 '일본인'이란 이미지가 강해요. 우리나라에서 15년 이상 거주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다른 나라에선 낯선 일이 많이 일어나죠. 전쟁도 일어나는데요 뭐... 우리나라가 아닌 곳에서, 다른 문화를 수용하고 있는 외국인이 한 일이라고 하면 어쩐지 내 일 같지 않게 느껴져요. 내 삶에 영향을 미칠 것 같지가 않아요. 그래서 사유리의 비혼 출산 소식을 접하고도 저 뿐 아니라 사람들도 그렇게 큰 논란으로 여기진 않았던 것 같아요. 만약 한국 사람이었다면? 사유리 말대로 정말 방송가에서 퇴출을 당했을지도 모르죠. 생태계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는 식의 갖가지 이유를 들어 괴롭히는 사람들에 의해서요.

출산 이후에 뉴스 보도를 통해 내 소식을 접하고 나처럼 비혼으로 아이만 낳아 키우고 싶다며 내게 자세한 방법을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다. 솔직히 말하면 그러지 말라고 말리고 싶은 마음이다. '당신은 했으면서 왜 나는 못 하게 하냐'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의 임신과 출산 사실이 한국 사회에 큰 저항 없이 비교적 쉽게 받아들여진 데는 내가 외국인이라는 이유가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저 사람은 원래 다른 세계에 사는, 우리와는 다른 사람이니까' 하는 외국인을 향한 조금은 배제적인 시선이 아이러니하게도 내 출산을 포용하는 방향으로 영향을 미친 게 아닐까.


이런 이유로 사유리는 말리는 입장에 서고 싶대요. 그리고 부모 중 한 사람이 아기를 키우고 싶은 경우 맞닥뜨려야 하는 현실적인 어려움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줬어요.

'부' 항목은 비워두었다. 내가 직접 낳은 아기이니 아기의 아버지가 없어도 출생신고를 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나와 반대로 아기의 양육자가 아버지뿐인 경우에는 출생신고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금 놀랐다. 일본도 한국도 결혼하지 않고 아기를 낳은 경우 '친모'만 자녀의 출생신고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유전자 검사를 통해 생물학적 친부임을 확인받아도 아기의 아버지가 출생신고를 하려면 친모의 인적 사항을 모른다는 것을 법적으로 증명해야 하거나 친모가 서류상 행방불명 처리되어 있어야 하고 별도의 소송을 거쳐야 하는 등 문제가 아주 복잡했다. 이런 탓에 출생신고를 하지 못한 채 아기를 키우며 힘들어하는 싱글대디가 적지 않다는 기사를 보았다.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아이이기 때문에 예방접종도 맞을 수 없고 병원에도 어린이집에도 갈 수 없다고, 한 싱글대디가 울먹이며 토로하고 있었다. 해당 법은 유전자 검사가 발달하기 전에 마련된 것인데 법의 변화가 기술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기사 말미에 적혀 있었다. 유기되는 아기를 위한 베이비박스를 운영하고 있는 교회나 사찰도 친권이나 가족관계등록법 등 복잡한 문제로 '미등록' 아기를 새로운 가정에 입양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몇 년 전, 한 싱글대디가 친모 증명에 어려움을 겪어 아기 출생신고도 하지 못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어요. 병원도 어린이집에도 보내지 못해 매우 힘들어하고 계셨는데요. 다행히 사랑이법(가족관계등록법 제57조)이 생긴 이후부터는 아이의 엄마 이름이나 주민등록번호를 몰라도 유전자 검사 결과를 거쳐 친부임이 증명 가능한 경우 출생 신고를 할 수 있게 바뀌었어요. '보육은 엄마 몫'이라는 족쇠가 엄마 뿐 아니라 아기, 아빠까지도 얼마나 옥죄고 있는지. 1975년 미국에서는 사별한 아내 대신 아기를 키우는 남편에게 보육 수당이 지급되지 않는 일이 있었어요. 당시 변호사는 사회 보장법에 내재된 젠더 차별은 아내와 남편, 아기 모두를 차별한다고 말한 바 있어요. 그리고 출생신고는 비단 아기의 복지 혜택 문제가 아니에요, 생존 문제지. 당연히 가져야 할 아기의 권리는 지켜줘야해요.

그리고 이런 생각 해보신 적 있나요? 우리가 쉽게 펼쳐드는 아기 그림책엔 응당 엄마 아빠가 등장해요. '곰 세마리' 노래도 그렇고요. 아기가 있으면 엄마 아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식당 종업원의 응대부터 공공기관의 서류까지 모든 것이 엄마, 아빠, 아이로 이루어진 가정을 기준으로 맞춰져 있다는 사유리의 말에 말문이 막혔어요. "아빠는 어디 있어?", "엄마는 어디 있어?" 같은 말도 앞으론 조심하려고요.

앞으로도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더 많은 형태의 삶이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10년만 지나도, 아니 5년만 지나도 나와 젠 같은 가족은 너무 흔해서 뉴스거리도 되지 않을지 모른다. 그때 그 모양이 어떻든, 이유가 무엇이든 조금 다르게 사는 사람들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자유롭게 드러내고 모두 함께 어울릴 수 있으면 좋겠다. 그 세상은 젠이 살아갈 세상이기도 하니까.

 

 

엄마

 



아기 곰이 귀여워서 만지려고 하면 어디선가 엄마 곰이 튀어나와 공격할지도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 하더라고요. 자기 새끼를 지키려는 본능은 누구나 다 같은가봐요. 작년, 사유리에게 이런 일이 있었어요. 한참 논란거리가 되었었는데요.

아파트 지하에서 화재가 발생해서 그녀는 아기를 데리고 근처 카페로 대피했어요. 하지만 급하게 내려오느라 핸드폰이며 신분증을 모두 놓고 오는 바람에 QR코드 체크, 신분증 확인 후 수기명부 작성을 할 수가 없었어요. 사유리는 아들이 입술이 파래질 정도로 떨고있는 걸 보고 잠시만 실내에 있으면 안 되겠냐고 했지만, 직원은 끝내 거절을 했다고 하죠. 그리고 사태가 수습된 이후 그녀는 자신의 인스타에 '한 아이의 엄마로서, 인간으로서 아이가 추위에 떨고 있는 상황인데 핸드폰이 없다는 이유로 매장에서 쫓아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서운함을 토로했는데요. 스타벅스 측은 정부 방역 지침을 최대한 준수하고자 노력한 부분이라는 해명을 내놨었어요.

기사가 난 후 사유리는 해당 카페에 재방문해 직원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했다고 해요. 이 분도 누군가의 소중한 딸일텐데 내 자식 지키자고 함부로 대한 것이 미안했다면서요.

사유리는 원래 그렇게 감정에 치우쳐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래요. 그런데 아이가 품에 있으니 신경이 오로지 아이에게로만 향해서 평소 자기 답지 않은 행동이 나왔다고 하네요.

엄마가 아이를 안고 공포영화를 보면 공포감을 두 배 이상 크게 느낀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보았다. 품 안의 아기를 지키려는 보호본능이 머릿속에 경고음을 더 세게 울리는 것이다. 그 보호본능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게끔 시야를 차단하고 몸과 마음을 자극한다. 경험해보니 그건 이성으로 조절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날 뼛속 깊이 깨달았다.


사유리는 비혼 출산이라는 남들과는 조금 다른 선택을 했지만 진심으로 아기를 사랑해요. 육아 이야기는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그립기도 반갑기도 했습니다. 물론 아빠가 없어서 체력적인 문제에 닥칠 때는 어려움을 겪기도 해요. 하지만 부부싸움 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수 있어 그건 또 좋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네요. 훗날 젠이 아빠를 찾으면 어떻게 대처할지 그건 오롯이 엄마인 사유리 몫이에요. 누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라요. 사유리는 잘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사유리와 함께 자라는 젠도 바르고 씩씩하게 잘 클 것 같고요.

자고 있는 젠을 바라보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나보다 소중한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니 전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아끼게 된다. 젠을 위해서 엄마도 열심히 살게. 젠도 나 자신도 열심히 돌볼게.

 

 


 


읽으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어요. 임신을 하기에 적당한 나이란 게 존재하는데, 여성은 그 시기에 다른 일에 더 몰두하고 싶을 수도 있잖아요. 임신과 출산과 육아는 인생에 큰 변화를 가져오니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죠. 그래서 더더욱 난자 냉동 시술에 관한 정보는 알고 있어야겠다 싶었어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싶은 책이에요. 임신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요.

그리고 한부모 가정, 조손 가정에 더 많은 배려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존재함을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인식하고 있을 수 있기를. 아기를 위해 더 열심히 살겠다고 얘기한 사유리, 사랑이법을 추진한 사랑이 아빠처럼 저도 제 자리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칠 방법을 생각해볼 거예요. 그럼 오늘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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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비하인드도어>를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다른 작품도 읽어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비하인드도어가 더 재밌었네요. 이 책의 묘미는 후반부에 모두 몰려있는 것 같아요. '누가 범인이지?' 의심하고 궁금해하느라 내내 기가 빨렸는데, 진상이 밝혀지고 그 사람이 실은 어떤 인간이었는지에 대해 서술하는 부분은 그야말로 짜릿 그 자체. 내용 소개해볼게요.

 

테라피스트 내용(스포주의)



앨리스와 레오는 짧은 기간, 그것도 주말 연애를 마치고 결혼에 골인합니다. 호화로운 주택에 함께 살게 돼요. 이 주택단지에는 다른 부부들도 살고 있는데요. 탐신네, 이브네, 마리아네, 로나 아주머니네... 이웃들의 눈길이 곱지만은 않네요? 텃세를 부리는걸까요?

앨리스는 알게 돼요. 이 집에서 누군가 죽었음을. 그것도 타의에 의해서. 죽은 사람은 니나라는 여자이고, 범인은 올리브라는 남자로 둘은 사이 좋은 부부였다는데요.

니나가 바람을 폈대요. 그리고 그 사실을 그녀는 이웃인 로나 아주머니에게 털어놓았다고 해요. 그 다음날 그녀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 돼요. 로나 아주머니는 진술했어요. 니나가 죽기 전, 올리브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봤다고. 하지만 올리브는 그 날 집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공원에 앉아 있었다고 경찰에 진술했어요. 과연 누구의 말이 맞는걸까요?

사건은 올리브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종결이 되버리고 맙니다. 그가 정말 진범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이제 가릴수가 없어요. 이웃들은 찜찜하지만 한편으론 안심하며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을 합니다.

올리브가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고 호소할 때 이웃들은 불안했거든요. 니나가 바람을 폈다고 했죠? 올리브가 아니라면 바람을 피운 사람이 죽였을 가능성이 크겠죠. 그런데 그러려면 그 자가 누구인지 이웃들을 의심해봐야 하고, 그 중엔 내 남편도 속해있기 때문에 내 남편도 의심을 해봐야 해요. 그리고 만일 바람 피운 상대가 범인이 아니라면, 그 사람의 와이프가 니나를 죽일수도 있는거예요. 이러한 가능성들이 그들의 숨통을 조였던 모양입니다. 올리브가 사건을 끝내주자 이웃들은 더는 파헤치려 하지 않고 일상으로 돌아가요.

 

앨리스의 혼란


앨리스는 이웃들과 친하게 지내기 위해 집들이 파티를 엽니다. 그런데 그 날, 웬 남자가 나타나요. '누가 아직 안 온걸까?' 어림짐작 하던 앨리스는 그 자가 '팀'이라고 확정을 지어버려요. 그는 자신이 누구라고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파티가 끝나고야 알았어요. 팀이 파티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럼 그 남자는 누구였을까요? 그는 앨리스가 집에 혼자 있을 때 자신이 죽은 니나 사건을 재조사하는 사립탐정이라고 소개하러 오는데요. 앨리스는 이 니나 사건을 그냥 흘려들을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죽은 자신의 언니 이름이 니나였거든요. 그리고 언니를 그렇게 만든 사람이 자기라는 죄책감을 평생 갖고 살고 있었고요. 판결에서마저 무죄를 받아 벌을 받을 기회마저 빼앗긴 앨리스에요. 앨리스는 옛날부터 '니나'라는 이름만 들으면 집착 수준으로 그 사람을 들여다보는 습관이 있었어요.

사립탐정 즉, 토머스는 자신이 올리브 누나의 부탁을 받아 움직이는거라고 얘기해요. 올리브의 누나는 현재 아파서 움직일 수가 없는 상태이며, 자신의 동생은 무죄이니 진실을 밝혀달라고 부탁했는가봐요.






앨리스는 당시 자신의 남편 레오를 의심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 집에 커다란 비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레오가 자신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신뢰가 불신으로 변한 상태에서, '그가 니나를 죽이고 범인이 범행현장에 다시 오듯 돌아온 건 아닐까.' 퍼즐을 맞춰보는 중이었죠.

남편에 대한 의심을 키우는 증거들은 속속들이 등장합니다. 일례를 얘기하자면 여권. 여권을 확인하니 그 안의 이름은 앨리스가 알고 있는 이름이 아니었어요. 여권 속 이름으로 인터넷에 검색을 하니 그가 실은 감옥 생활을 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요. 다른 집 다 놔두고 왜 꼭 이 집에 살려는 고집을 부렸는지, 왜 아내인 내게 이름을 거짓말 했는지... 레오를 향한 앨리스의 신뢰는 바닥으로 추락합니다.

비슷한 시간, 이웃사람들은 여전히 앨리스를 이해하지 못해요. 그나마 친한 사람이었던 이브는 앨리스를 이해하는 듯 보였지만 책의 후반부에 탐신이 "당신은 망상증 환자예요!" 라고 말할 때 평소와는 달리 이브가 탐신을 제지하지 않죠. 마치 어느정도는 그 말에 동조한다는 듯이요.

앨리스는 우리 집에 웬 남자가 왔었고, 그 남자는 사립탐정이며, 올리브 누나의 부탁을 받아 사건을 재조사 하고 있다는 얘기를 사람들에게 거듭했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왜 끝난 일을 다시 화두에 올리느냐며 그녀를 못마땅해했죠. 특히 탐신이요. 그녀는 폭발해요. 당신은 우리 모두를 의심하고 있고, 우리는 당신이 말한 그 남자를 보지 못했다. 이제 좀 그만하라고 말이예요.

생각해보면요... 토머스는 일주일에 한 번씩 앨리스네 집에 왔거든요. 그런데 이웃들은 그를 본 적이 한 번도 없대요. 어떻게 된 일일까요?

 

반전


토머스는 로나 아주머니의 아들이었어요. 부모를 폭행하는 못된 아들, 실명은 존이었죠. 그리고 니나 사건의 범인도 그였습니다. 이웃들이 이제껏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이유는 로나 아주머니네서 앨리스 집이 매우 가깝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었어요.

 

"올리브는 누나가 없어요!"


토머스는 올리브 누나의 부탁을 받아 조사하고 있는거라고 했는데. 여느때처럼 그와 나란히 커피를 마시고 있다가 탐신에게 받은 문자가 촉발점이 되어 앨리스는 떨기 시작해요. 그리고 올리브에게 정말 누나가 없는지 확인을 해달라고 레오에게 보낸 문자의 답장을 토머스가 목격한 순간, 그의 본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는 앨리스를 묶고 그녀의 머리를 잘라요. 그는 다른 사람의 심리를 조종하고 이용하는데 기쁨을 느끼는 성격장애자였어요. 로나 아주머니는 뒤에서 황망히 그를 바라만 보는데요. 폭주기관차인 아들을 말릴 힘이 없어서요. 그 순간 로나 아주머니의 남편인 에드워드 아저씨가 충격으로 돌아가세요. 앨리스와 로나 아주머니는 용기를 내서 토머스를 쓰러뜨리고, 무차별적으로 타격을 가해 그에게 벗어나요.

앰뷸런스 안에서 앨리스와 로나 아주머니가 나누는 대화가 인상적이에요.

 

"아주머니가 제 목숨을 구했어요. 그게 아주머니가 한 일이에요. 아주머니가 제 목숨을 살렸어요." 그리고 몸을 내밀어 아주머니에게 키스했다. "고마워요."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자신의 아들을 죽인 엄마에게,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모자를 하나로 묶고 있던 탯줄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도록 그토록 잔인하게 잘라버린 엄마에게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때 아주머니가 갑자기 기운이 나는 듯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내가 댁의 목숨을 구했다면, 날 위해 한 가지만 해줄래요?" 아주머니가 물었다. "그리고 우리 바깥양반을 위해. 바깥양반도 그걸 원할 거예요." "물론이죠, 뭐든지요." "살아요."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당신 몫의 인생을 살아요. 지난 20년 동안 과거 속에서 살았잖아요. 이제 온전한 삶이 주어졌으니 죄책감 때문에 인생을 낭비하지 마요. 인간은 누구나 실수하는 법이니까."


'니나' 에서 이제 그만 벗어나라고요. 죄책감으로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고요. 물론 죄를 지었으면 죗값을 치러야합니다. 하지만 앨리스의 경우는 사고였어요.

이런 말도 나옵니다. '법원이 나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무죄를 선고하면서 나는 처벌받을 권리를 빼앗겼고 그때부터 스스로를 벌해왔다.' 고... 앨리스가 잡은 운전대의 차 안에 사랑하는 언니와 엄마가 있었고 모두에게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났던 것 뿐...

 

그래서 그런거였다. 그가 옥살이를 했다는 걸 알았을 때 용서하지 못한 건 그의 범죄 이력이 아니라 질투 때문이었다. 나는 과거에 발이 묶여 있는데, 그는 자신이 저지른 짓을 속죄하고 새인생을 살 수 있었다는 사실이 샘났다. 안 그래도 그가 니나에 대해 말해주지 않아서 당황하고 있던 차에 혼란이 더욱 심해졌고, 그래서 신뢰해도 될 것 같은 그 사람에게, 로나 아주머니의 은밀한 경고로 의도치 않게 생긴 불신과 의심이 주변 사람들과의 우정을 물들이기 시작하면서 한결같음을 상징하게 된 그 사람에게 의지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토머스 그레인저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 건 오직 그가 밤중에 집 안을 어슬렁거리며 내게 두려움을 주입시켰다는 것 뿐이다. 나머지는 내가 그의 손에 놀아나서 자초한 일이다.


죄책감으로 시작된 상상이 결국은 앨리스를 집어삼켜 일어난 비극. 내 주변 사람들을 의심하고 끝내는 나조차도 믿을수가 없게 되는. 한마디로 주제에 딱 맞는 주인공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앨리스는 토머스에게 놀아났어요. 그가 만들어놓은 판 위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는 게임말 같았죠.

생각해보면 죄책감은 얼마나 무서운 감정인가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머리를 마비시키죠. 죄책감으로 인해 다른 사람을, 나를 슬프게 하는 일도 서슴지 않아요. 앨리스는 로나 아주머니에게 삶의 큰 지혜를 배웠어요. 작중의 앨리스처럼 죄책감으로 내 삶을 갉아먹고 있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제 글을 읽고, 괴로운 그 감정에서 벗어나면 좋겠어요. 토머스처럼 내 그 감정을 이용하는 사람이 나타나기 전에요.






토머스의 정체가 드러나기전까진 누가 누구를 해하지도, 그런 시도를 하지도 않는데 쫄깃한 긴장감이 인상적인 책이었어요. 근데 영화로 치자면 마지막 10분을 위해 모든 시간에 누군가를 의심하고 실망하고 의심하고 실망하고의 연속이라 저 개인적으로는 조금 지치고 힘들었던 책이었기도 합니다. 재미가 후반에 너무 몰빵되어 있어요.

 

다들 올리버가 니나를 죽였다고 그렇게 빠르게 인정한 데는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어쩌면 그들이 누군가를, 니나와 바람을 피웠다고 의심되는 서클의 누군가를 보호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게 누구일까?


이 긴장감을 너무 오래 가져가야 해요. 전에 읽었던 저자의 <비하인드도어> 같은 경우 주인공의 본모습이 빨리 드러났고, 그 후 각기 다른 씬들이 속도감 있게 진행됐기 때문에 읽는 재미가 있었는데...

그래도 다른 책을 또 읽어보려 합니다. 내용적으로는 조금 루즈한 편이었으나 가독성은 좋았거든요. (저자의 장점인 것 같아요.) 다음에 읽어볼 책은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작품이면 좋겠어요. 오늘도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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