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청소년문학을 읽었습니다. 이번에도 이금이 작가의 작품인데요. 이번엔 '너도 하늘말나리야'시리즈를 읽을 때와 조금 달랐어요. 청소년들이 등장인물로 나온다는 점은 동일하나 울컥하는 부분이 훨씬 많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주머니 속의 고래>는 꿈을 찾는, 찾게 되는 청소년들의 여정을 그린 이야기예요.

꿈이란 건 본디 가슴에서 우러나와 열렬히 희망하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은 모두 그런 것은 아니죠. 생각지 못 했던 길을 걷다가 발견되는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실패해서 낙담하고 있을 때 눈 앞에 있던 것이 우연히 발견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가지각색으로 바삐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꿈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요? 꿈을 꾸는 아이들은 자체만으로 반짝반짝 빛이 났습니다. 보는 내내 부러울 정도로요.

평범한 일상 속에서 꿈을 찾게 되는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세요🐬


 

아이들🌿



민기, 현중, 준희, 연호는 중학생입니다. 민기는 잘생긴 얼굴로 길거리 캐스팅을 당하고, 연예인을 꿈꾸는 현중은 민기를 부러워했죠.

준희는 목에 큰 점이 있는 일명 공개입양아 입니다. 하지만 소수의 걱정어린 시선을 뒤로하고 그는 집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요. 그러던 어느 날, 진짜 엄마를 만나게 되는데요. 그녀는 과연 누구일까요?

연호는 증조외할머니와 살고 있습니다. 아빠는 모르고, 엄마는 있는데 집에 잘 안 들어와요. 엄마라는 사람은 전세보증금을 빼 갔고, 새 집을 구해준다면서 현재 감감무소식입니다.

민기의 집에 세들어살던 집에서 반지하방으로 이사가는 날에도 엄마는 오지 않았어요. 연호가 스트레스와 영양실조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할 때에도, 엄마는 오지 않았습니다.

연호🍀



아직 열 여섯밖에 안 된 연호에게 세상은 너무 가혹해요. 어른 아니, 부모가 짊어져야 할 짐을 연호보고 다 지고, 거기에 또 늙은 증조외할머니의 짐까지 들라고 하고 있어요.

연호는 친구인 민기네 집에 세들어사는 세입자이기도 한데요. 민기 엄마는 가끔 반찬을 가져다주고, 민기는 자기에게 힘든 일이 있으면 연호에게 토로하러 오곤 합니다. 연호는 가져다 줄 반찬이 없고, 민기에게 힘든 것을 토로하지도 않는데 말이에요.

하지만 차라리 그 집에 살 때가 좋았던걸까요? 이사갈 때가 되었는데 온다던 엄마가 안 와요.

할머니와 연호에게 주어진 돈으로는 부엌과 욕실, 방 하나 딸린 어둡고 퀘퀘한 반지하방밖에 별다른 대안이 없었습니다.

이제 그 집에서... 90세 할머니를 돌보며 살아가야 해요. 열 여섯 연호의 마음은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이삿짐을 옮길 때 남자친구들인 현중, 민기, 준희는 힘을 보태줍니다. 연호는 그 사실을 더없이 수치스러워하지만요. 연호는 한때 민기를 보며 가슴 설렜던 적이 있고, 현중, 준희와는 서먹한 사이예요. 자존심 세고 강해보이는 이미지의 연호가 자신의 초라한 형편을 모두에게 드러내게 되었으니 얼마나 속이 상하고 비참했겠습니까.

이사하는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아무것도 쳐다보지 않는 텅 빈 눈을 하고 있던 연호.

그런 연호가 좋아한 건 노래였습니다. 삶이 어깨를 무겁게 짓누를 때 코인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연호의 유일한 낙이었지요.

연호에게 볕들 날이🌻



민기, 현중은 드림박스라는 기획사에 연호, 준희와 함께 부른 노래를 몰래 녹음해 보내는데요. 기획사에서 연호에게만 러브콜을 보내요. 뜻하지 않았던 곳에서 기회가 찾아왔네요?

기획사 연습생이 된 연호.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며 가수가 되기를 기다리는 연호는 이제서야 조금 발을 뻗고 잘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감무소식이던 엄마는 뒷바라지를 해주겠다며 집에 찾아와 혼자 계시는 할머니를 도와드려요. 미운 엄마지만, 네, 만약 엄마가 없었다면 연호는 기획사에서 연습을 할 수 없었을겁니다. 할머니를 돌봐야 하니까요.

연호는 과연 데뷔를 할 수 있을까요? 이 책을 보는 독자분들도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아마 저처럼 연호를 응원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혹시 저처럼 눈물을 글썽이진 않으셨는지 묻고싶네요.




 

밑줄 그으며 본 하이라이트

 

엄마와 함께 목욕하는 게 싫었다. 엄마가 제대로 돌봐 주지 않는데도 잘 자라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딸에 대해 마음을 놓는 게 싫었다.



오랜만에 찾아와 엄마 흉내내는 연호 엄마에게 연호가 품은 생각이에요. 어때요? 연호 짠하지 않나요? 관심 받고 싶은 거예요. 딸과 함께 찜질방을 찾은 엄마의 딸을 향한 관심을, 없는 줄 알았던 그 끈을 이젠 죽어도 놓고 싶지 않은겁니다. 속으로 울면서 발악하고 있는 거예요. '엄마, 나에 대한 마음을 놓지마.' 라면서. 아직 아이라 표현이 서툴 뿐입니다.

작가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대단하다고 느껴요. 어떻게 이렇게 청소년들의 예민하고 어설픈 마음을 잘 헤아리시는지요.

작은아들에게 사춘기가 왔다고 생각하는 엄마는 준희가 짜증을 내거나 신경질을 부려도 여유 있는 웃음으로 대처했다. 오히려 준희가 여느 아이들처럼 제때에 사춘기를 겪는 걸 흐뭇해했다. 준희는 그게 더 짜증났다. 모든 아이들이 겪는 통과의례를 거치고 있다고 편하게 생각하는 가족에게 거리감이 느껴졌다. 왜 그러냐고 다그치기라도 한다면 핑계 삼아 혜지와의 일과 그로 인한 충격, 상처 등을 털어놓을 수도 있을 텐데. 가족은 입양아란 사실이 준희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까맣게 몰랐다.



사춘기의 특징 중 하나는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준희를 보며 어릴 때의 저를 되돌아보고, 십 년 후 우리 아이를 떠올려봤어요.

아마 방 문을 닫고 오래도록 나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 닫힌 방문으로 저는 아이가 어떤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궁금해 하는 엄마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오래 생각할겁니다. 생각나는대로 말하지 않을거예요. 말을 다듬고 다듬어 선물처럼 건넬겁니다.

저는 아이가 겪고있는 그 사춘기를, 가슴이 산산조각 나는 그 경험을, 해봤으니까요. 대충 아니까요.

"저 살 집 구하는 건데 이래도 네, 저래도 네, 무슨 허깨비랑 다니는 것 같더라니까." 엄마가 간식거리를 내놓으며 말했다. "애가 감당할 만한 일이 아니니까 본능적으로 현실을 회피하는 거지. 잘해줘." 간식을 먹으러 나온 누나가 모처럼 옳은 소리를 했다.



집을 보러 다니는 일은 배가 부르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공부도 마찬가지. 마음에 여유가 없는 아이들은 공부도 못 해요. 부모가 고민해야 할 것들을 대신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죠.

게다가 연호는 돈이 없었습니다. 뭘 가릴 처지가 아니었어요. 한 마디 했다가 수치스러운 말이 돌아오면 안그래도 나약해져 있는 마음에 타격이 얼마나 심한데.

'이래도 네, 저래도 네' 하며 연호는 연호 나름대로 버티고 있었을 겁니다.

이웃집 아주머니가 혀를 찼다. 무관심보다 동정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이건 진짜 가난을 겪어 본 사람만 할 수 있는 생각인데...

아무렇지 않게 슈퍼를 갔는데 동정에 혀를 끌끌 차던 할머니들이 생각나요. 그 눈빛들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 눈빛과 말이 눈 앞의 아이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지 아느냐고, 왜 나를 그렇게 동정하는지 따져묻고 싶었죠. 그럴 수 없는 현실에 저는 또 지칠 뿐이었지만요. 다른 사람의 에너지를 깎아먹는 행동이예요, 그거.

민감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 아이들에게 나는 신중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리라고 다시 한 번 다짐합니다.

곧 궁상이 땟물처럼 줄줄 흐르는 살림살이들이 들어와 놓이기 시작했다. 짐을 들고 내려와 집 내부를 본 현중은 더는 농담을 하지 않았다. 민기는 투덜거리지 않았고, 준희는 연호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눈길을 피했다.



침묵이 소음보다 시끄럽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침묵으로 많은 말을 하죠.

연호는 그동안 시내를 쏘다니는 아이들을 경멸하고, 옷 타령, 신발 타령하는 민기를 한심하게 여겨왔다. 하지만 연호가 진정으로 바란 건 그 애들처럼 사는 거였다. 부모를 졸라 옷과 신발을 사고, 참고서 값을 속여 피시방에 가고, 시험 점수를 놓고 휴대폰이나 용돈을 흥정하는 것. 어느 것도 할 수 없었던 연호는 아이들을 경멸하고 한심해하는 걸로 위안 삼았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소망일 수 있어요.






저에게 이 책은 연호입니다. (그래서 매우 치우쳐진 경향이 좀 있죠? 연호 이야기만 줄줄...)

하지만 이 책에는 민기, 현중, 준희의 이야기도 담겨 있어요. 사람마다 느끼는 건 다 다르니까요, 직접 읽어보시고 저처럼 가장 마음에 와닿는 아이의 이야기를 꼽아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작가님의 다른 작품 후기글도 올려드리겠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을 섬세히 캐치해내는 분이예요. 그래서 아이 가진 부모에게 육아를 하는 데 작가님 작품이 도움이 많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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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너도 하늘말나리야'도 '주머니 속의 고래'와 같이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이에요. 유명한 작품이니 꼭 읽어보세요.

오늘도 마음 편안한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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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회 한겨레 문학상 수상작입니다.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었다고 하는데 믿을 수가 없어요. 현대사회를 그려내는 묘사가 대단히 날카로워요. 이 책이 상을 받았을 당시 예심 심사위원은 물론이고 본심 심사위원까지 모두 만장일치를 했다고 해요.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이 책을 읽고 나면 누구든 납득을 할 수 있을 거예요. 작가님, 정말 대단하세요.

 

<줄거리>



한 여자 아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자기소개를 하지 않아요. 간접적으로 누가 불러주지도 않지요. 사람들은 늘 저 편한대로 이름을 만들어 부르곤 했어요. 예쁘거나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 게 아닌 욕지거리에 가까운 걸로다가요. 게다가 몇 살인지도 몰라요. 아무도 모릅니다.

아니, 부모는 알았을 수도 있어요. 낳았으니까. 아이가 아프건 말건 슬프건 말건 상관은 없지만, 자기 몸, 자기 시간 희생 했던 날은 기억할 거예요. 하지만 부모는 아이에게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정도로 아이에게 관심이 없었거든요.

밥을 먹었는지, 씻었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몰라요. 한 번은 아이가 죽은 척을 합니다. 그런데도 관심이 없네요. 죽은 척을 했다는 사실조차 몰라요. 엄마는 백 번도 넘게 밥을 안 주고요. 아빠는 틈만 나면 때립니다. 오죽하면 아빠가 '내 곁을 그냥 스쳐지나가기만 해도 고맙다'고 느꼈을 정도니까. 어떤 심정으로 살고 있었을 지 짐작이 가세요?

아빠가 엄마를 때릴 때 엄마는 그저 맞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맞으면 보호해주지 않았고요. 그 생활을 못 견딘 아이는 집을 나옵니다. 진짜 엄마, 진짜 아빠는 이런 사람들일 리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진짜엄마'를 찾아 떠나게 되지요. (그런데 '진짜아빠'는?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미운 정까지 다 탈탈 털리고 나면 기대조차 하지 않게 되는 사람 심리를 나타낸 걸까요)

 

1. 장미언니



집을 나온 아이는 웬 남자 아이를 만나게 됩니다. 조금 덜떨어져 보이는 아이였는데, 그는 여자들이 불건전한 일을 하는 곳에 살고 있었어요. 거기 사장이 자기 엄마였거든요. 그 아이를 따라간 곳에서 여자 아이(편의상 앞으로 소녀라고 하겠습니다)는 남자 아이의 숙제를 대신 해주며 숙식을 해결해요. 그리고 그 곳에서 장미언니를 알게 됩니다.

그녀는 예쁘고, 향기도 좋은 사람이었어요. 남자 아이의 엄마가 소녀를 박터지게 때릴 때 보호를 해주기도 했고요. 그래서 소녀는 장미언니가 내 '진짜엄마' 가 아닐까 생각해요.

하지만 이 언니의 단 한 가지의 흠이라면, 남자친구에 있었습니다. 백곰이라고 불리우는 남자친구는 걸핏하면 언니를 때리고는 했는데요. 여기서 문제는 장미언니가 전혀 반격을 하지 않는다는 데 있었어요. 나중에 백곰이 소녀와 단 둘이 있을 때 말로 가슴을 후벼파는 장면이 나오는데, 소녀는 이 말엔 꿈쩍도 하지 않아요. 하지만 언니가 백곰에게 그저 맞고만 있는 모습은 견딜 수가 없었죠.

 

그런 사람은 나의 진짜엄마가 될 자격이 없다. 엄마가 가짜가 된 이유도 그 때문이다. 가짜엄마는 그냥 맞고만 있었다. 나는 그게 너무 싫었다. 처음엔 모든 게 내 탓인 줄 알았다. 내가 보기에 아빠가 엄마를 때릴 이유는 하나도 없었으니까. 곤히 잠들었을 때도 쥐의 걸음 수를 헤아릴 만큼 예민했고 하얀 밥에 반찬 양념 묻히는 걸 싫어할 만큼 깔끔했으며, 누군가에게 나쁜 말을 들으면 맨살을 사포로 문댄 것처럼 오랫동안 아파했다. 그런 사람이 단숨에 괴물로 변해서 여자를 미친 듯이 때리는 데엔 분명 이유가 있을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이렇게 약한 엄마는 내 진짜엄마가 될 자격이 없으니까요. 나를 지켜줄 수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소녀는 실망을 한 채 가게를 나오게 됩니다. 진짜엄마를 찾는 첫 번째 시도는 보기좋게 망했어요.

 

2. 태백식당 할머니



정처없이 걷다가 기차역에서 웬 할머니를 만나게 돼요. 할머니는 소녀에게 국수도 만들어 주고, 잠 잘 곳도 마련해줍니다. 손님이 거의 오지 않는 망한거나 다름 없는 식당을 운영 중이었던 태백식당 할머니. 소녀는 할머니 손을 잡고 장도 보러 가고, 장터에서 솜사탕도 사먹고, 태어나 처음 보는 신기한 것들을 구경하며 편안하고 행복한 기분을 느껴요. 누군가에겐 흔한 일이죠? 엄마 손을 잡고 장 보러 가는 일. 소녀에겐 인생의 첫 장에 기록 될 만한 대단히 기념비적인 날이었습니다.


나보다 조금 뒤늦게 식당으로 돌아온 할머니의 손에는 책이 들려 있었다. 찬수가 풀던 문제집과 비슷한 것이었다. 나는 할머니가 보는 앞에서 문제를 휙휙 풀어댔다. 할머니는 꾸부정하게 앉아 내가 하는 모양을 오랫동안 쳐다보다가 활짝 웃었다. 그때 처음 봤다. 할머니의 웃는 모습. 할머니가 웃으니까 나도 웃음이 날 뻔 했다. 그래도 꾹 참았다. 하지만 웃음은 눈물과 달리 참는다고 쉽게 참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참고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아주 조금 웃었다. 내가 웃는 걸 보고 할머니가 또 웃었다. 봄바람이 창문을 와르르 훑으며 지나갔다.


이 글은 하이라이트를 해두었다가 읽고, 또 읽고... 몇 번을 반복해 읽었는지 몰라요. 읽을 때마다 행복해지는 단락이에요. 작가님의 필력과 묘사가 거의 충격적입니다.

소녀의 웃는 모습이 상상 되지 않나요? 너무나 반짝이는 영화 같은 한 순간이죠. 웃는 할머니 얼굴을 보고 참고 참다가 기어이 웃음이 터진 이 장면은 너무나도 아름다워요. 봄바람이 창문을 훑으며 지나갔다는 표현은 화룡점정입니다.

이야기로 돌아가볼게요. 어느 날, 누군가 찾아와요. 남자 여자, 그리고 여자 아이 둘. 남자는 할머니의 아들이었는데요. 서울에서 내려온 모양이에요. 그들은 서울살이 버릇을 못 고치고 할머니의 얼마 되지도 않는 수입을 제 돈 쓰듯 펑펑 써버립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드디어 본론을 얘기하죠.

이 식당을 팔고 그 돈을 사업 자금으로 좀 쓰자고. 할머니는 나는 이 식당만 있으면 된다며 호소에 가까운 거절을 해요. 아들은 그런식으로 줄곧 할머니를 괴롭혔어요. 그래서 소녀는 할머니를 지키기 위해 아들의 다리를 깨물어 버립니다. 진짜엄마가 꼭 젊을 필요는 없다고, 이렇게 늙은 할머니여도 내 진짜엄마일 수 있다고, 그렇게 믿고있던 소녀를, 할머니는 쫓아내버렸지만요.

이 기분에는 대체 어떤 단어가 가장 적합한가요? 행복을 느끼게 해 준 사람 고마운 사람, 나보다 더 소중하다고 믿었던 내 사람에게 내쫓기는 그런 기분 말이에요. 우리는 이해할 수 있어요. 그래, 가족이니까, 라는 생각에 다다를 수 있는데요. 소녀는 무척 괴로웠을 겁니다. 다음 날, 할머니는 소녀에게 돈을 쥐여주고 작별을 고해요.

 

3. 폐가의 남자



거지꼴로 돌아다니던 소녀의 손을 잡아준 '목소리'. 지나치게 따스한 그 목소리는 그녀를 교회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게 하고, 찬송가를 부르게 해요. 강요하진 않았어요. '목소리'에게 중요한 건 사람들의 시선이었으니까. 사람들은 거지꼴인 소녀를 거둬들인 후 밥을 주고 또 잘 곳을 제공 해주는 그를 추켜세워줍니다.

하지만 소녀는 언제나 착한 척만 하는 남자와 교회가 싫었어요. 우연히 알게 된 폐가의 남자가 오히려 더 편했죠. 그는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소녀를 존중해 주었어요. 그래서 폐가 밖의 삶보다 폐가 안의 삶이 더 안락하고 행복하다고 느끼게 돼요. 그 안에서 소녀는 책도 많이 읽고, 누가 버린 일기장도 읽으며 나름대로 편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폐가의 남자와 소녀를 발견했을 때, 그들은 웬일인지 그들을 떼어놓기에 급급해요. 아무것도 묻지 않고 한 명은 가해자, 남은 한 명은 피해자를 만들어 버리죠. 그렇게 그들의 편안한 나날은 단숨에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물론 등따시고 배부른 생활을 한 건 아니니까 누가 봐도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전의 삶보다 현재를 더 행복하다고 느끼고 무엇보다 스스로 만족하며 지내고 있었는데, 그 시간을 누가 무슨 권리로 빼앗을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돼요. 왜, 행색이 초라한 사람은 행복이 뭔지도 모르는 바보니까요? 그래도 되는거예요?

행복의 기준은 내가 정하는 거잖아요. 방법을 가르쳐줄 순 있어도 강요하면 안 되죠. 특히나 가난한 사람들에겐 내 생각이 맞다고 가해지는 폭력이 너무 보편적인 것 같아요. 맘 아파요.

 

4. 각설이패



소녀의 진짜엄마를 찾아 떠나는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딘가에는 분명 내 진짜엄마가 있을거라고 확신해요. 그러다 이번에는 각설이패를 만나게 되는데요. 트럭을 타고 전국을 돌며 불쇼와 농담을 들려주고 엿과 테이프를 파는 사람들이었어요. 소녀는 그들이 음악을 즐기고 무언가에 열중한 모습에 빠져들게 돼요.

대장이라고 불리우는 사나이는 소녀처럼 진짜엄마를 찾아 헤매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이유는 조금 달랐으나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결핍된 마음을 채우고자 마음은 똑같았어요.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한 사람이었죠. 그리고 또 한 명, 불같은 성격의 대장과는 정반대 스타일의 '달수 삼촌'. 그는 다정하고 세심하게 소녀를 챙기는 진짜 삼촌 같았습니다.

그들과 함께한 시간은 매 장면을 엮어 모아 하나의 영화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예요. 마음이 답답하면서 동시에 아픈 구석이 많았네요.

달수 삼촌이 소녀와 헤어질 때, 손에 쥐어준 정은 마치 제게 쥐어진 뜨거운 무엇처럼 다가왔어요. 꼭 생생한 마음을 전해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기어이 터져버린 눈물 같은 마지막 포옹도 흘러넘치게 슬펐고요.

하지만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그 시간이 마냥 행복만 했던 건 아니예요. 새까만 재같은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냈던 소녀의 이 마음을 좀 보세요.

 

나는 맞지 않기 위해 작아지고 싶었다.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나를 찾지 못할 만큼 작아진다면, 가짜아빠가 나를 때릴 수도 없을 테니까.
아니, 그것도 거짓말이다. 나는 개미만큼 작아져서 가짜아빠의 몸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아주아주 강력한 폭탄을 들고. 그래서 가짜아빠의 몸을 산산조각 내고 싶었다. 살점 하나 남지 않을 만큼.
아니아니, 그것도 다 거짓말이다. 나는 엄마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원래 내가 살던 곳.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고 안락한 그곳에 다시 들어가 죽을 때까지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곳에서 그냥 엄마인 채로 살고 싶었다.


이토록 어두운 생각은 잊을만 하면 떠오르고 잊을만 하면 떠올라 도통 행복할 기회를 주지 않아요. 소녀가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 감이 오시나요. 이건 부모를 미워하는 수준을 넘어섰어요. 원망하는 수준을 넘어섰어요. 그들은 그녀를 정말 산산조각 냈거든요. 각기 다른 곳으로 떨어진 파편들이 '가짜아빠! 가짜엄마!' 하고 울부짖는 것 같지 않나요. 포효하는 것 같지 않나요. 나를 엄마 뱃 속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통곡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제까지 누군가를 만나 마음이 들뜰 때마다 진짜엄마가 아닌가 싶어 잠시나마 희망을 맛보았지만, 그 예상은 늘 보기좋게 빗나갔어요. 하지만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매일 자고 일어난 소녀의 마음이 전 날보다 더 커져 있었다는 거예요.

 

많은 것에 익숙해지는 동안, 나는 키도 조금 자라고 머리카락도 많이 길고 그리고, 무언지 모를 어떤 것도 불쑥 자랐다. 그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누구에게 확인받을 길도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나는 느낄 수 있다. 폐가에서 남자가 주워 온 책을 읽으며, 남자와 나란히 누워 차디찬 허공을 말의 온기로 조금씩 채우던 순간, 터미널에서 삼촌이 나를 꼭 껴안던 그때 울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면서, 내 안의 어떤 것이 커졌다.


세상은 내 생각보다도 더 혹독하다는 것, 그러니 이 세상에 맞서 지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내 자신을 보호해야 함을 깨달은 게 아닐까요. 엄마 배에서 나올 때부터 우리는 사랑을 받고, 나는 사랑 받을만한 존재라는 걸 확신 하면서 커요, 보통은요. 하지만 이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한 돌 한 돌 쌓아 내가 살 집을 짓습니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날아오는 돌을 피해 몸을 숨길 곳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니까요.

그런데 생각보다 이런 사람 많은 거 아세요? 잔잔한 바다에 때때로 파도가 치는 보통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매일 폭풍우가 치는 마음을 잠재워야만 살 수 있는, 그러기 위해 아주 아주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만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대체 부모는 내게 왜 그랬을까?', '나는 왜 태어난거지?', '나는 뭐하는 사람일까?' 와 같은 풀리지 않는 대답을 수도없이 자문하면서 말이에요.

저 또한 그런 시간을 견뎌왔기 때문에 소녀의 모든 말과 행동이 마음 아팠어요. 내가 내게 건넨 질문, 돌아오지 않은 대답, 영원히 풀지 못할 것 같은 숙제, 그럼으로 내가 나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저주했던 시간. 그것들은 이제 한 단어에 꽁꽁 묶어뒀습니다. 그리고 저는 현재 그 단어를 밟고 살아가고 있죠. 탄력성이 좋고 향기 나는 마음이 아니라 속상할 때도 있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그 지옥 같은 시간을 지나 이만치 성장한 내가 대견할 때도 있는걸요.

 

5. 유미와 나리



집을 나온 유미와 나리는 부모에게 심한 학대를 받은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정신과 신체는 모두 부모의 좋은 스트레스 해소 대상이었어요. 그들의 안타깝기 그지없는 여러 일화는 비행청소년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것들이었고요. 그들이 안타까웠던 이유는, 이제까지 소녀가 만나왔던 사람들보다 독자인 제가 더 만나기 쉬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조용히 주변을 돌아보게 되고, 조금 더 멀리에 있는 이웃들도 살펴보게 되더라고요.

 

난, 어린애에서 바로 노인이 된 것만 같아.


관심 끄라고 매서운 눈을 하면서도 실은 겁먹은 고양이 같은 아이들. 또래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장을 보고, 영화를 보고, 저녁을 먹고, 자기 친구를 집에 데려와 함께 노는데, 그들은 존재 가치라는 단 하나의 질문에 부모의 대답을 듣지 못 해 자신들이 그 답을 풀어보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때론 해서는 안 되는 행동도 하며 나도 누군가에겐 가치 있는 사람이란 걸 증명하려 하죠. 각 나이엔 어울리는 얼굴이라는 게 존재하는데, 왜 이들은 노인의 가면을 쓰고 사는지 몰라요. 누가 쓰도록 만든 거예요?

유미 나리와 어울리며 소녀는 한 남자 아이를 알게 됩니다. 그들은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곳에서 겨우 몸만 숨겨 함께 지내게 돼요. 그리고 옆에서 집 허물어지는 소리가 들리던 어느 날.

 

해가 저물 때까지 계속된 싸움에 노인들은 지칠대로 지쳤지만, 아무도 물러나진 않았다. 양복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 가서 얘기 좀 하자고 노인들을 끌고 갔다. 협상을 해주려나 보다 기대하고 그들을 따라간 사이 용역들이 빈집에 불을 지르고 컨테이너를 부쉈다. 시뻘건 불이 치솟았다. 집 안에는 옷이며 이불이며 세간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세상 단 한 장뿐인 사진도 있을 것이고, 어린아이의 일기장도 있을 것이다.


철거된 집에 살고 있던 사람들, 사라져가는 집을 지켜보는 그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노는 타오르는 시뻘건 불보다 더 거셌을 거예요. 소녀는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만 만나왔던 것 같네요. 그들의 배경은 항상 전쟁이었던 것 같고요.

유미와 나리, 그리고 당신의 곁을 스쳐간 그 이름 없는 소녀의 결말은 책에서 확인 하시라고 공개하지 않겠습니다. 흥미진진하니 꼭 읽어보세요.

 

 




이 책이 좋았던 이유는 어린 날 내가 느낀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을 대신 표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나도 몇 개의 단어만으로밖에 그 때를 설명할 수 없는데, 나보다 더 나의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 아주 자세하고도 날카롭게 표현을 해 준 느낌이었어요.

이런 사람들이 작가를 하는구나 싶더라니까요... 새삼스럽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경이로움마저 느꼈네요.

소설의 참맛은 나와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게 하는 데 있지 않겠습니까? 그 의미를 완벽하게 충족시킨 책. 그리고 그 어떤 에세이집보다 큰 위로를 준 책이었어요.

책을 덮고 제가 바로 다음 한 일은 '구의 증명'을 독서 리스트에 넣은 것이었습니다. 기대 돼요. 아주 많이. 작가님 앞으로도 책 출간 많이 해주세요...🙏 좋은 작품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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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로 큰 사랑을 받아 우리나라에서도 영화화 된 <안녕, 헤이즐>은 영화를 보지 않았어도 너무나 유명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영화의 리뷰를 보니, '한동안 여운이 남는 멋진 영화', '따뜻한 듯 아픈 영화', '삶에 대한 생각과 태도가 달라지게 하는 영화' 등의 극찬이 주를 이루었는데 책을 보며 내가 느낀 작가의 이야기 방식이 그의 작품을 접하는 모두에게 비슷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리라고 생각한다.

'이름을 말해줘'에서 그는 같은 이름의 여자만 19명을 사귀는 신동을 통해 사춘기 소년소녀의 풋내기 사랑과 어설픈 실수, 찬란하고 아름다운 청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신동소리를 듣고 자란 19살의 콜린은 사랑을 '수학적 그래프 공식'으로 만들어 19명의 캐서린에게 차인 이유를 알게 되길 원했는데 그와 더불어, 공식을 만듦으로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고 싶다'는 명백한 사실을 콜린 스스로 실토했던 부분이 현실적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콜린이 무려 19번이나 같은 이름의 다른 사람에게 차이는 기분을 나는 잘 모르지만, 친한 친구와 자동차 여행을 한다고 긴 시간 집을 떠나있는건 당연해 보인다. (그것은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제대로 된 형태로 만져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이다.) 물론 19살의 콜린이 한층 성숙되기 위해 하산과 여행을 떠난 건 아니었겠지만 여행을 통해 우연히 만나게 된 여러 사람들로 인해 콜린은 많은 것을 배웠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유레카!"라고 외치는 콜린에게 하산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다. 사랑은 공식화 될 수 없다는 걸 설득하지 않는 일도 친구 입장에선 쉬운게 아니었을텐데 콜린은 친구도 참 잘둔 것 같다.

어느 날 콜린은, 솔직하고 순수한 소녀 린지에 끌려 양아치 '또다콜(또 다른 이름의 콜린)'을 물리치고, 캐서린이 아닌 여자와 컴컴한 동굴에서 단 둘이 뽀뽀를 하기에까지 이른다. 콜린이 이제까지 19명의 캐서린을 만나왔던 건, 그저 우연이었다고 콜린은 이야기 하지만 필연으로 만들어낸 인위적인 과거 반복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생각해보면, 지나왔던 캐서린들을 학문처럼 공부했던 것이 어쩌면 19번이나 차일 수 있었던 이유가 될 수도 있지 않나.

난생 처음 캐서린이 아닌 여자와 뽀뽀한 순간, 콜린은 비로소 미래를 바라볼 수 있었다.

콜린이 우연한 여행을 계기로 강박에서 벗어나 홀가분한 마음으로 건샷(머물렀던 장소)을 떠나는 장면이 아직도 눈 앞에 아른거린다. 하산과 자동차 여행을 하러 처음 건샷에 왔을 때 얼굴에 가득했던 근심은 어딘가로 묻혀버리고,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와 설렘의 아우라가 온 몸 곳곳에서 피어났다. 사랑은 손가락이 아닌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는 당연한 말이 새삼 교훈처럼 느껴진다.

더불어 등장인물들이 미성년자여서 더없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장면들이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다.

19살의 콜린, 하산, 린지, '또다콜'은 이제 겨우 첫 발을 떼었기에 나로서는 그저 부러워서 심장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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