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뇌사, 장기기증, 인간의 존엄 등을 다루고 있다. 평소에 관심 있던 분야가 아니었고, 주변에 이러한 일로 고통을 받고 계신 분이 없기 때문에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이같은 주제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없었는데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볼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누군가에게 일어난 일이라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고, 주변인들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그럴 일이 앞으로도 없다 할지라도 소설 속 인물들처럼 고통 받고 있는 이름 모를 사람들에게 나의 무지로 말실수를 하거나 무례를 범할 가능성을 낮추기 위해서도 고민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일본 소설이다. 일본에서 뇌사, 장기기증 문제는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책에서 주인공인 가오루코는 딸인 미하루가 뇌사 추정 상태에 빠진 것을 보고 의사에게 장기기증에 관한 설명을 듣는다. 일본 의료, 법률 체계상 뇌사 판정을 위해서는 보호자의 장기기증 동의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만일 보호자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환자는 무기한 연명치료를 해야만 한다.)
1997년 일본은, 기증자가 생전 서면으로 '장기 기증 및 뇌사 판정 동의' 를 표시한 경우 혹은 그와 별도로 배우자나 부모, 자녀 등 가족 모두가 기증에 동의해야만 뇌사 판정을 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2010년 법 개정 이후 기증자가 명시적으로 거부하지 않은 한 가족이 '장기 기증에 반대하지 않는다' 고 묵시적, 명시적으로 동의한 경우에도 뇌사 판정을 내릴 수 있도록 완화가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가족의 동의는 필수 요건으로 남아 있다고.
가족들에게 심히 어렵고도 무거운 선택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내용을 조금 더 가까이 느끼기 위해 우리나라 법을 찾아보았다.
우리나라도 일본과 비슷했다. 뇌사 판정은 독립적인 '사망 판정' 이 아니라 <장기등 이식에 관한 법률> 에 근거해 장기기증을 전제로 이루어지는데 (의료진이 환자를 뇌사 추정 상태로 보고 신고하더라도 보호자가 장기기증에 동의하지 않으면 법적으로 뇌사(사망)로 선언되지 않는다는 뜻) 그 결과, 장기기증 동의가 없는 뇌사 추정자는 임상적으로 뇌 전체 기능은 소실된 상태일지라도 법적으로는 여전히 생명 유지 치료 대상인 뇌사 추정자, 즉 '생존자' 로 남게 되며 이는 환자와 가족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면서도 의료진의 뇌사 선언 남용을 막는 장치이기도 하다고 한다.
뇌사 판정이 내려져야 사망으로 인정받고 사망진단서가 발급된다. 사망진단서는 장례 절차를 진행하고 보험금을 청구하며 관헌에 사망 신고를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문서다.
하지만 뇌사 판정을 받으려면 가족이 장기기증에 동의를 해야 하고... 원하지 않으면 환자가 심장이 멎을 때까지 연명치료를 해야 한다니.
물론,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2018년 제정되고 시행된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르면, 환자가 임종기(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로 진단이 되었을 시 보호자와 합의를 거쳐 인공호흡기 또는 심폐소생술 등의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고 한다.
* 여기서 임종기 환자란,
회복 가능성이 없고, 치료에도 불구하고 증상이 점점 악화되어 사망에 임박한 상태에 있는 환자를 말하는데(법 제2조 제2호) 사망이 가까운 미래에 도래할 것이 명확하고, 의학적 회복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태여야만 한다.
따라서,
뇌사 추정자는 무조건 임종기가 아니며 심장, 폐, 혈압 등이 기계적으로 잘 유지되고 있으면 임종기 진단이 어려울 수 있고, 오히려 산소 공급과 약물로 생체 징후가 안정적이라면 뇌가 기능을 멈췄어도 임종기로 보지 않는다고 한다.
뇌사 상태에 빠진 환자와 그 가족들이 마주한 현실이 얼마나 참담한지 이 정도면 설명이 되었을까?
이 책은 소설이지만 허구는 아니기 때문에 진지하게 공부해 보았다. 관심이 생겼을 누군가를 위해 이 책의 줄거리를 남긴다.
✨줄거리(스포주의)
가즈마사와 가오루코는 별거 중이고 곧 이혼을 앞두고 있다. 남편인 가즈마사가 바람을 피웠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그들의 딸인 미즈호가 수영장에서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 병원 측은 그녀를 뇌사로 보고 부모에게 장기 기증 여부를 묻는다.
생전에 미즈호는 네잎클로버를 발견하고 집으로 가져가자는 엄마에게 '나는 이미 행복하므로 다른 누군가가 이걸 보고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일화를 떠올린 가오루코는 미즈호가 자신은 비록 죽었어도 누군가에게 좋은 쓰임이 되었다는 걸 알면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장기 기증에 동의하려 한다.
하지만 장기 기증을 결정하고 마지막으로 딸의 손을 잡았을 때, 그들은 미즈호가 손을 움직였음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장기 기증 의사를 철회했고 뇌사 판정 절차도 중단했다.
한편, 미즈호의 아빠 가즈마사는 하리마 테크라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그 회사의 '인공 지능 호흡 조절 시스템'을 이용해 자발 호흡이 불가능한 미즈호의 몸에 특수 장치를 부착해 그녀를 호흡이 가능한 상태로 만든다. 그리고 엄마 가오루코는 그런 그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하리마 테크의 직원을 집에 불러 전자 장치를 통해 미즈호의 손과 발을 움직일 수 있도록 한다.
미즈호에게는 이쿠토라는 남동생이 있다.
이쿠토가 어렸을 때에는 누나가 그저 깊은 잠이 든 줄로만 알았다. 그리고 부모님이 누나를 이쿠토의 학교에 데리고 왔을 때, 친구들은 누나가 실은 자고 있는 게 아니라 죽은 것이라고 말했고, 죽은 사람을 데리고 다니는 모양을 보고 이쿠토를 왕따 시키기까지 한다. 그 일 이후 이쿠토는 누나를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다. 어차피 죽은 사람인데 쳐다봐야 무슨 소용이 있으며, 이미 죽은 사람이 계속 우리와 함께 사는 건 기괴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 같다.
엄마는 미즈호가 그때 그때 나이가 되었을 때마다 또래 아이들이 할 법한 것들을 경험시켜 주려 애쓴다. 그런데, 어울리는 옷을 입혀주고, 머리를 땋아주고, 산책을 시켜주는 것까지는 텅빈 엄마의 마음을 채우기 위한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넘길 수 있었는데, 선생님을 집에 불러 책을 읽어주게 하고 이야기를 들려주게 하는 건 같은 엄마인 나도 처음엔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 책의 말미에 이런 말이 나온다. 아이를 위해 미칠 수 있는 건 엄마 밖에 없다고.
가오루코는 미즈호가 살아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다른 가족들이 실은 미즈호가 죽었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오루코 앞에서는 그렇지 않은 듯 행동하다가 들통이 나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 날 가오루코는 경찰을 불러 그 앞에서 칼을 들고 칼날을 미즈호에게 향하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 말처럼 이 아이가 정말 죽은 것이라면, 내가 이 아이를 죽여도 살O이 아닌거죠?' 라고 말이다.
그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 했다.
미즈호를 처음 보는 사람은 그녀가 깊이 잠들어 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병원 측에서도 의아하게 여겼던 점으로, 미즈호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육체가 성장했기 때문에 가오루코는 더더욱 딸을 놓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모두에게 죽은 것이라고 생각 되어지던 미즈호가 정말로 세상을 떠나는 일이 발생하고 만다.
엄마는 새벽에 불현듯 일어나 딸의 마지막 인사와도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데, 그녀는 미즈호가 정말 세상을 떠난 직후 본인의 곁을 떠난 바로 그 시간을 그녀가 죽은 시간이라고 정하기도 한다. 의사가 뇌사 판정을 하고 사망 시각을 일러주었음에도 인정하지 않는다. 내 곁을 떠난 그 시간이 내 딸이 진정 이 세상을 떠난 시간이라고.
미즈호의 장기 중 심장은 소고라는 한 소년에게 이식된다. 소고는 미즈호를 만난 적이 있다. 미즈호는 소고를 만난 적이 있다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이야기는 미즈호가 단 한번도 눈을 뜨지 않은 채로 끝이 났고, 커다란 물음표를 남긴채 마무리가 되었다.
이 책에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나오는데, 각 인물들에 이입을 해보면 모두 공감이 된다. 가즈마사도, 가오루코도, 시아버지도, 외할머니도, 아들도, 여동생도, 그리고 가오루코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까지 모두 다.
그건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이번에는)가오루코에 이입이 되었다. 뇌사 상태인 미즈호가 장기 기증이 절실한 누군가에게 단 하나의 빛인 상황이라 할지라도 내 아이의 심장을 기증해야 할 의무는 없으니까. 그렇게 원하지 않는 장기 기증을 했다 하더라도 그 다음은 가오루코가 서서히 죽어가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내 아이가 장기 기증이 절실한 상태라면? 뇌사 상태가 되어 죽은 것이나 다름 없는 누군가의 심장을 마치 맡겨놓은 양 왜 기증하지 않는 것이냐고 답답한 마음으로 채근했을 수도 있겠다.
작 중 미즈호를 보고 도망간 한 여인이 생각난다. 그 마음도 충분히 이해 된다.
이 책을 다 읽고 독후감도 다 써가는 마당에 '이 책에 대한 제 감상은 이렇습니다' 라고 할 만한 한 문장이 떠오르진 않는다.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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